문화/생활
특별귀화자로 한국인 된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나는 이제 진짜 한국 사람이오. 무지하게 기쁜게 우리 함께 잘살아 봅시다잉!”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겉모습은 영락없는 외국인이지만 그의 입에서는 연방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사방에서 웃음과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4대(代)가 1백17년 동안 변치 않는 ‘한국 사랑’을 이어 온 미국인 집안에서 마침내 첫 ‘한국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인 소장은 좁은 골목도 다닐 수 있는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고, 대북 지원사업에 헌신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귀화자로 선정됐다.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국적을 허용한다”는 국적법에 따라 선대(先代)의 공로로 후손들이 특별귀화 허가를 받은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로로 특별귀화자가 된 것은 인 소장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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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의 가계(家系)는 선교·독립운동·교육·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한국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린 기록으로 가득하다. 첫 인연은 1895년 인 소장의 외증조부인 유진 벨(Bell·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한국 땅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벨 선교사는 ‘전남 지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다.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튼(Linton·한국명 인돈)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한남대학을 설립했다. 윌리엄 린튼은 국권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받았다.
인 소장의 아버지 휴 린튼(한국명 인휴)은 말 그대로 이 땅에서 피를 흘리고 뼈를 묻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고, 1984년 농촌선교 사업 도중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인 소장이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휴 린튼은 적정한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택시로 병원에 옮겨지던 중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인 소장은 “농촌의 좁은 길까지 올 수 있는 구급차만 있었어도 아버지는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1993년 미니버스를 개조해 좁은 길에서도 쉽게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된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었다. 인 소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3천여 명의 소방대원에게 응급구조법을 가르치면서 지금의 119 응급체계의 산파(産婆)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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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어머니 로이스 린튼(한국명 인애자) 역시 40년 동안 의료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호암상을 받은 뒤 상금 5천만원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구급차 하나를 북한에 기증해 달라”고 했다.
이듬해 인 소장은 선교활동을 하는 형 스티븐 린튼(한국명 인세반)이 운영하는 유진 벨 재단의 도움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형제는 북한에 결핵약품과 의료장비를 무상 지원하여 북한 결핵퇴치 사업을 전개하는 등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공로로 인 소장과 그의 형은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인 소장은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고 어릴 적 순천에서 자란 ‘전라도 촌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내 핏속에는 한국 사람의 정이 흐른다”며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추억에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 고향은 ‘마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자 의사가 되기 위해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 의대에 진학하길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조국인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1년간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한 후 진로를 다시 정하자는 데 합의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 진학했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병만 얻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입학을 앞두고는 ‘거시기’ ‘아따’ ‘긍께’ 등 전라도 사투리 쓰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표준말을 배우기도 했다. 그 후 인 소장은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부교수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한국 의사로서의 삶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동안 인 소장은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한국사람임을 자처해 왔다. 그동안 몇 번이나 귀화를 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어머니가 진주만 폭격을 받은 세대이고 아버지가 미 해군에서 복무해 애국심이 대단해서 내 귀화를 반대하셨어요. 너무 속상했지만 (어머니 뜻이) 그러니 할 수가 있겄어요? 그런데 특별귀화제도가 생겨서 어머님한테 바로 말씀드렸더니 정말 기뻐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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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소장은 이번 특별귀화 허가를 받으면서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을 통해 미국시민권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어머니를 안심시키면서 진짜 한국사람이 된 것이다.
“항상 한국에 살면서도 2퍼센트 부족한 마음이었는데 이젠 특별귀화 제도를 통해서 1백퍼센트 한국 사람이 됐응게 아주 기뻐요. 나는 어차피 여기서 뼈를 묻을 거니까. 이제 마음이 더 편하니까 오늘부터 더 다리 쭉 뻗고 잘라고.”
인 소장의 포부는 의료 분야에도 ‘한류’ 바람을 불러 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의사들이 손재주 좋고 기술도 좋은데, 아직 의료 한류 부분에서 미진한 것 같다”며 “이 부분에서 좀 더 선두에 나서서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권승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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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