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들리지 않는 것이요? 어두운 한밤중 혼자 깨어 있는 느낌이에요. 외롭고 쓸쓸하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하죠. 하지만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해 본 적은 없어요.”
청각장애인이 겪는 세상을 그녀는 차분하게 수화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밝았다. 어릴 때부터 어둡고 쓸쓸한 세계에 자신을 숨기는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세상과의 격리감을 느낄 때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내 미래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성당에서는 아이들과 놀아 주기를 맡았다.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크리스마스 행사 때는 공연단 활동을 했다. 각종 후원행사에서는 도우미를 자청해 물품판매는 물론 수화봉사도 도맡았다. 고아원을 방문해 위문행사도 했다.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도 제게는 부모님이 계시잖아요.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보람과 함께 고마움을 느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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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성격을 가진 신세대답게 운동과 춤 실력 등에서도 다재다능하다. 어려서부터 익힌 수영은 장애인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정도로 수준급이다. 암벽등반, 스노보드, 스키 등 못하는 운동이 없다.
3년여 전부터는 난타 연습을 해서 웬만한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다. 그녀는 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몸으로 악기의 진동을 느끼고 마음으로 리듬을 탄다. 물론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어느덧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김씨는 스스로 했던 맹세를 확인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5월 12일 혜원씨는 2007년 미스프랑스 2위에 뽑힌 소피 부즐로(24)를 만났다. 부즐로 역시 청각장애인이지만 미인대회를 거쳐 모델의 길을 걸으면서 장애인 문화 향유권 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부즐로는 자서전을 홍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김씨가 다니던 국립서울농학교에서 강연회를 연 것이다. 그녀는 학생들과 수화로 대화를 나눴다. “존재 자체로 평가되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답니다.”
같은 청각장애인인 부즐로의 존재는 김씨에게 충격이었다. 장애를 갖고 위축되기보다는 모든 면에서 당당한 모습이 좋았다. 김씨도 부즐로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김씨는 인터넷을 뒤적였다. 그러곤 운명처럼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제1회 미스월드코리아 공고를 보게 되었다. 과거 ‘미스농아’에 선발된 적은 있지만 정상인들과 함께하는 대회는 처음이었다.
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혼자 방에서 거울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걸음걸이를 만들었다. 미인대회 응모자들이 흔히 받는 과외수업은 받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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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본선 진출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결과는 훨씬 좋았다. 최종선발 50명 중 5위에 입상했다.
“아주 어렸을 때 TV에서 모델들이 워킹하는 것을 보며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즐로를 만나고 미스월드코리아 5위에 입상하면서 이젠 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저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죠.”
이후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모 인기방송프로그램에 ‘기적을 만드는 소녀’로 출연해 다재다능한 끼를 보여주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멘토가 되고 싶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좋은 일이 계속 이어졌다. 지난 12월 한국예술종합전문학교(한국예전) 모델예술학부 수시모집에 당당히 합격한 것. 그것도 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3천만원 상당의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그녀는 오는 2월 국립서울농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다. 지금까지는 농학교에서 청각장애인들과 생활했지만 앞으로는 ‘건청인(건강한 청력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가야 한다.
사실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기대하는 마음도 크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닫은 상태에서 지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세상에서 말을 하는 방법은 구화(口話)도 있지만 수화(手話)도 분명 존재한다. 다행히도 학교 측은 김씨를 위해 이론수업 때는 수화통역을 배치하기로 했다.
“이제 시작인걸요. 설레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도전인 셈인데요.”
김씨는 요즘 길거리를 다닐 때에도 꿈을 꾸며 걷는다. 노란색 점자 블록 길을 걸으며 그녀는 패션쇼 무대를 상상한다. 허리를 펴고 앞을 똑바로 보면서 한 발짝 두 발짝….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박수갈채를 귀로 느끼지 못하지만 워킹은 사뿐하고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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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녀의 꿈은 모델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델 장애인 활동가’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자유스럽지만은 않아요.
사람들 시선도 그렇고, 드러난 차별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지요. 그런 편견들을 조금씩 없애고 싶어요.”
김씨는 이제 시작이지만 앞으로 사회에서 장애인 처우 개선을 위해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비 대학생인 그녀는 이제 곧 새롭게 만날 친구들에게 대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친구들 안녕. 나는 모델예술학부 12학번 김혜원이야. 만나서 반갑고, 앞으로 청각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대해 주면 고맙겠어. 그리고 가능하면 수화를 배워서 함께 얘기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글·이제교 (문화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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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