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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을 때도 병인양요 오로지 애국




1967년 어느 날 프랑스 국립도서관. 검은 머리칼을 짧게 친 39세의 한국 여성이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찾아냈다. <직지심체요절>.

그때까지 중국 책으로만 알려져 있던 책의 맨 뒤에서 ‘1377년 금속으로 찍은 활자본’이라는 내용을 접한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5년 뒤 그는 파리에서 열린 ‘책의 해 기념 고서(古書) 전시회’에서 “직지는 1377년 금속으로 찍은 세계 최고(最古) 활자본”이라고 공개해 전 세계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항의가 빗발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독일 구텐베르크가 1455년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이나 앞서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고?”

소란의 주인공은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 직원이던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 박 박사는 이 전시회와 유럽 내 ‘동양학자대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최고 활자본임을 입증해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

지난 11월 22일 별세한 박병선 박사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55년 프랑스로 유학 갔다. 한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은 여성 1호였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다.


학창 시절 스승인 이병도(1896~1989) 교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고서들을 약탈해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이 안 된다. 유학 가면 한번 찾아보라”고 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 박 박사는 10여 년간 도서관·박물관 등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러다 먼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것. 그는 고활자본을 해독하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워 아침에 도서관에 출근하면 동료들이 ‘눈이 왜 빨개? 너 어제 울었니’라고 묻기 일쑤였다.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어 찍어보다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

“감자로도 만들고, 지우개로도 만들고…. 그러다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직접 잉크에 찍어봤더니 책에 찍힌 활자 형태와 같은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확증을 한 것이죠.”

본격적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다니던 1975년 베르사유궁에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더니 사서가 푸른 천을 씌운 큰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책을 펼치니 조선 왕실 기록물인 <의궤(儀軌)>였다. 1866년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한 후 도서관 창고에서 ‘파지(破紙)’로 분류돼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한국 여자’가 외규장각 문제를 제기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응은 차가웠다.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1979년 사표를 강요받았다. 사실상 해고였다. 한국 정부도 그녀를 못 본 척했다. 해고된 뒤에도 박 박사는 ‘개인’ 자격으로 10여 년을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외규장각 도서 내용 파악에 매달렸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 봐 밥도 안 먹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 놓고 있는 그녀를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라고 불렀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6월. 박 박사는 마침내 외규장각 도서 2백97권이 1백45년만에 모두 고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지켜봤다. 외규장각 도서 귀환 환영식 참석차 귀국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 같다”며 감격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의궤가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다시는 프랑스에 가지 않도록 여러분 모두가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박 박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긴 시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정부와 학자들의 냉대였다”고 했다. “동양학자대회 때 직지를 발표하고 나니 어떤 한국 학자는 ‘네가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 했는데 네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외규장각 도서문제를 제기했을 때는 한국 외무부에서 왜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느냐며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아쉬워했다.

그가 고국의 따뜻함을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병마(病魔) 때문이었다. 지난 2009년 귀국했던 그는 뜻밖의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돈도 없이 막막했던 그의 사연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성원이 답지했다. 덕택에 지난해 1월 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연구할 게 많아 프랑스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수술받고 10개월 뒤 파리로 돌아가서도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2편>의 저술 준비 작업에 매달렸다. 박 박사의 유언은 “책의 출판을 마무리 지어 달라”였다. 유족들은 “생전 한국의 역사에 헌신한 박사의 뜻에 따라 파리 외방선교원을 영결식장으로 택했다”고 밝혔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의 영원한 인생 테마는 ‘병인양요’ ‘한국 역사’였다.

한편 박병선 박사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영결식은 지난 25일 오전 10시30분(한국시각 오후 6시30분) 진행됐으며, 고인의 유해는 3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동한 뒤 충혼당에 안장될 예정이다.

박 박사의 유산 2억원과 장서 9상자는 인천가톨릭대학교에 기부된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박 박사가 인천 교구 정신철 보좌 주교와의 인연으로 인천가톨릭대에 유산을 기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천주교 신자인 고 박병선 박사는 1998년 지인들과 함께 떠난 성지 순례에서 정 주교와 처음 만난 뒤 친분을 유지해 왔다.

글·허윤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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