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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 유지 잇는 이재현 환경부 정책관




“신부님이 남겨주신 나눔의 가치를 많은 이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고(故) 이태석 신부가 선종한 지 1년인 지난 1월 14일. 수단에서 이 신부의 봉사활동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원했던 이재현(51) 환경부 기후대기정책관은 이렇게 감회를 밝혔다. 그는 요즘 수단 어린이 지원활동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그는 8년째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이 신부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이재현 정책관이 처음 이태석 신부를 만난 건 2000년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국 요원으로 케냐 나이로비에서 파견근무를 할 때이다. 이 신부가 선교활동을 하던 남수단의 톤즈마을로 연결되는 비행기편은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없었다. 이 신부는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인 나이로비를 찾아 몇 주씩 머물러야 했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 당시 나이로비의 한인 가톨릭회장을 맡았던 이 정책관은 이 신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성당 뒤에서 누가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하도 수수하게 차려입어 로만 칼라(성직자의 목을 두르는 옷깃)가 아니었다면 신부인지도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이 신부로부터 남수단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전해 들었고 한인회 차원에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톤즈마을을 직접 찾기로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02년 초 이 신부가 톤즈마을에 가자고 제안했지만, 그해 여름에는 파견근무를 끝내고 한국에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톤즈마을로 이끌었다고 회고한다. 이 신부가 톤즈마을로 돌아가던 날 “우리 바로 못 헤어질 거야. 내가 기도할 테니까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야!”라며 알 듯 말 듯한 기도를 했다는데, 기적같이 나이로비 체류가 1년 더 연장됐기 때문이다.


2003년 3월 톤즈마을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이 정책관의 동료들은 “먼지에 싸움판에 그곳에 뭐하러 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장을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곳”이라며 앞다퉈 말렸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가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차라리 그 돈이면 유럽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출발 사흘 전 한밤중에 걸려 온 이 신부의 전화는 갈팡질팡하던 그의 마음을 굳히게 했다.

“하 서방(하나님) 빽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출발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20년 이상 계속된 내전에 시달려 온 톤즈마을 사람들의 삶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늘진 곳도 섭씨 38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역시 살인적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의 삶은 ‘문명 이전의 삶’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정도였다. 밖은 훤히 보이고 모래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집, 가구도 옷장도 책상도 부엌도 이불도 없는 방. 반나체로 걸어다니며 눈만 빼고는 온몸 전체가 먼지로 범벅이 돼 눈만 껌뻑이는 아이들, 식기도 수저도 없이 하루 한 끼 수수로 만든 죽을 손으로 후루룩 먹으며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

진흙탕 물을 식수로 사용할 정도로 낙후된 위생상태 때문에 이들이 겪어야 하는 병고도 안타까웠다. 더러운 물에 사는 기생충 알이 몸속에서 자라나 근육을 파열시키거나 피부를 뚫고 나오기도 했고, 선진국에서는 벌써 사라진 결핵으로 고통받아 뼈만 앙상한 채로 돌아다니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우리 돈으로 불과 몇백 원 하는 항생제 한 알, 진통제 한 알이 귀해 병을 키우고 괜한 병고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의 처참함에도 놀랐지만, 그들을 어루만지는 신부님의 헌신적인 활동에 또 한번 놀랐다”고 그는 말한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는 인력으로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였지만, 이 신부는 A부터 Z까지 진료카드를 빽빽하게 채워가며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가난에서 오는 관절염 환자들이 특히 많았는데 그런 환자들은 앙상한 몸에 썩은 피고름이 가득 차 제대로 걷지 못해 엉금엉금 기어들어오기도 했다. 상처가 났을 때 바로 치료하지 않고 자기들 처방대로 방치했다가 고통을 키운 것이다.

한번은 난산을 하는 산모가 무당에게 굿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돼 이 신부를 찾은 적도 있었다. 머리가 다 으깨진 태아를 이 신부가 받아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이 신부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에 대해 2005년 펴낸 <아프리카의 햇살은 아직도 슬프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여태껏 예수님이 보이신 ‘빵의 기적’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바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사제 중 한 분이 가난하고 무지한 이곳에서 5천명을 먹이고 계셨습니다. 아니 5만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라는 빵 하나가 앞으로 5백만명은 먹일 것입니다.”


2003년 6월 귀국한 이 정책관은 남수단의 실상을 국내에 알리고 이신부를 지원하는 활동에 나섰다. 2004년 수단어린이장학회를 설립하고, ‘수단 이태석 신부님’이라는 인터넷 카페도 만들어 톤즈마을 돕기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 신부가 잠시 귀국할 때마다 수단어린이돕기 음악회를 열어 후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정책관의 노력으로 장학회는 현재 후원자가 9천명에 달한다. 공무원에서부터 해물탕집을 경영하는 중년여성까지 수많은 사람이 톤즈 주민 돕기에 나서고 있다. 특히, 이 신부의 삶이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로 만들어지면서 시민들의 후원이 급증했다. 덕분에 톤즈마을에는 고등학교와 병원이 만들어졌고, 1천5백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을수 있게 됐다.

이 정책관은 “신부님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어렸지만 ‘부드러움이 강한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며 “꼭 금전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재능이라도 주변에 나눠주는 모습이 신부님이 진정 바라던 가치였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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