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고구마 수확이 한창이다. 빨간색부터 자주색, 주황색, 우유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의 고구마를 캐어 밭이랑에 놓는다. 언뜻 봐도 한 종류만 심은 고구마밭이 아니다. 이랑에는 전문가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와 낱말이 적힌 푯말이 여기저기 꽂혀 있다. 가을걷이로 분주한 전남 무안군 청계면 농촌진흥청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의 2헥타르가 넘는 고구마 시험포장(농작물의 시험에 사용하는 땅) 풍경이다.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준설(52) 농업연구관이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캔다.
이 연구관은 ‘고구마 박사’다. 지난 17년간 연구실과 시험포장을 오가면서 ‘해피미’ ‘바이오미’ ‘주황미’ ‘하얀미’‘보라미’ 등 고구마 신품종 25가지를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특히 2006년 개발한 호박고구마 ‘연황미’는 농가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면서 그도 덩달아 고구마 박사로 유명세를 탔다.
그는 고구마 작물의 품종 개량과 지역별 특성에 맞는 품종 보급, 재배 농가의 소득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10월 9일 제18회 대산농촌문화상 농업기술부문 대상을 받았다. 이 상은 교보생명 창업자인 고(故) 대산(大山) 신용호 선생의 뜻으로 1991년 설립된 대산농촌문화재단(이사장 정태기)이 주는 것으로, 국내 민간 농업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이날 농업경영 부문에서는 조기심 농산무역 대표, 농촌발전부문에는 문규환 전북 고창군 농업기술센터 대표와 곽동원 진안군청 전략산업과 마을만들기팀장이 각각 수상했다. 조 대표는 네덜란드와 뉴질랜드가 독점하고 있던 일본 파프리카 시장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문 대표는 야생 복분자 재배법을 개발한 공로로, 곽 팀장은 주민 주도의 상향식 마을 만들기 사업 추진으로 새로운 농촌개발 모델을 제시한 공로다.
이 연구관은 1992년 겨울부터 고구마 연구를 시작했다. 농촌진흥청 목포시험장에 근무하던 연구 초년생에게 맡겨지다시피 한 과제였다. 당시 고구마는 연구원들 사이에 비인기 육종 작물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육종 전문가들은 전망이 밝은 쌀과 보리, 옥수수, 콩, 감자 등 5대 작물과 원예, 과수 등 작물 개발에 치중하고 있었다.
“육종 전문가들은 쌀과 보리 등 식량 작물에 관심이 많았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마이너 작물인 고구마는 관심 밖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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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험장에 연구 과제로 떨어진 목화, 참깨, 고구마 중에서 고구마는 연구 초년생인 그의 차지가 됐다. 처음에는 고구마 육종이 내키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에 생각을 바꿨다. 되레 고구마를 농가의 효자작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내 고구마 육종 전문가는 한두 명에 그쳤다. 이전 연구와 성과물이 거의 없는 맨땅에서 연구를 시작해야 했다.
뛰어난 고구마 육종의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병충해에 강해야 한다. 둘째, 크기가 작고 수량이 많이 달려야 한다. 셋째로 소비자의 기호를 고려해 외관이 잘생기고, 주황색과 자색 등 속살이 컬러풀해야 한다. 이런 원칙에 맞춰 그는 실험실과 시험포장을 오가며 수없는 인공교배와 도태, 선발 과정을 되풀이했다.
머릿속에 신품종을 그리며 인공교배를 한 후 씨앗을 얻는 게 고구마 육종의 첫 단계다. 매년 2만 개의 씨앗을 심고 다음 해에 신품종 후보군 5백~6백 개만 남기고 도태시킨다. 이 후보군은 7년 넘게 검증을 거치면서 겨우 2, 3개만 남는다.
신품종 개발의 마지막 관문은 전남과 전북 등 전국 5개 지역을 거치는 시험재배다. 이곳에서는 전국 어떤 농가가 신품종을 재배해도 균일한 수량이 보장되고, 외관의 변형이 없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익산과 강화, 논산, 여주, 보령 등 고구마 주산지를 대상으로 보급하고, 현장에서 여러 차례 평가회를 갖는다. 지역의 우수품종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이다. 이처럼 고구마 육종의 가장 어려운 점은 그 지역 토양에 적응시키는 일이다. 이 연구관은 “고구마는 토양에 아주 민감해 지역이 조금만 달라도 잘 자라지 않는다”며 “신품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전국 어디서도 재배가 잘되는지를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힘든 과정을 거쳐 신품종이 탄생한다. 하지만 어렵게 개발한 신품종도 실제 농가 재배 시 병충해에 약하거나 소비자의 반응이 냉담할 경우 살아남지 못한다. 이 연구관은 고구마 육종을 20여 가지 개발한 끝에 연황미 신품종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연황미는 호박색을 띠어 호박고구마로 통한다. 맛 좋고 모양도 매끈한 데다 수확량이 많아 뛰어난 육종의 3박자를 모두 갖췄다.
무엇보다 고구마의 고질병인 덩굴쪼김병(잎이 누레지고 땅속줄기가 검게 변해 자라지 못하는 병)에 내성이 강할 뿐 아니라 유통 단가가 높아(일반 고구마 10킬로그램당 2만7천원, 연황미는 3만2천원 선) 농가에 빠르게 보급됐다. 최근에는 해남 화산농협에서 수출도 시도하고 있다.
새만금 간척지에서 재배에 성공해 올해 초부터 보급하고 있는 고구마 신품종 ‘대유미’도 그의 작품이다. 일반 고구마보다 전분 함량이 월등히 많아 바이오에탄올의 생산성이 높은 데다 대량생산도 가능해 친환경 대체에너지 작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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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고구마의 응용 분야도 다양하다. 그가 개발에 참여한 컬러 고구마는 자색 고구마인 신자미, 보라미, 연자미, 주황색 고구마인 신황미, 주황미, 해피미 등이 있다. 안토시아닌 함량이 많은 자색 고구마는 항산화, 항암 효과가 좋으며, 음료, 천연 색소, 와인 등 활용 분야가 넓다. 베타카로틴 함량이 많은 주황색 고구마는 샐러드용, 천연 색소 개발 등에 응용된다. 이 밖에도 컬러 고구마를 활용한 섬유 염색 분야도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구마의 미래에 대해 장밋빛 청사진을 펼쳐 보인다. 예전 식용 위주의 고구마에서 음료와 와인, 식초 등 기능성 가공식품으로 전환하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재배면적당 소득이 높다는 점에서도 유리하다고 한다. 국내 고구마 재배면적은 총 2만1천 헥타르로 농가소득은 3천억원 이상이다. 고구마밭 10헥타르당 평균소득은 93만원꼴로 일반 작물보다 2, 3배 높다.
17년 전 우연히 접한 고구마. 이 연구관은 어느새 고구마 전도사가 됐다. 공휴일에도 출근하고 시험재배한 고구마를 들고 퇴근하는 그를 못마땅해하던 가족(부인과 2남)도 이제는 적극적인 후원자다.
글·한현묵(전남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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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