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여야와 좌우가 왜 이리 극렬하게 대립한다고 보십니까.
집단적, 개인적 이해관계의 대립이라고 봐야죠.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이해관계죠. 그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을 해야죠. 예를 들어 빈부 격차를 줄이자는 주장은 사회주의적 관점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정치인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주장은 많은데 ‘사실적 관계’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부족한 것 같아요. 뭔가 주장하려면 우선 현실적으로 대안이 가능한지 고려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를 타도하자는데 그럼 국민 모두가 받아들일 대안이 뭐죠? 과거 조선시대의 ‘상소(上疏)’문화에서 임금을 질타하는 문구를 보면 조선이 왕정체제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예요. 저도 선비들의 기개와 서슴지 않고 얘기하는 문화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주장했으니까 그것이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임금, 바르게 하시오’라고 주장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지가 없어요.
오늘날의 갈등에도 그런 명분적 전통의 영향이 남아 있군요.
저는 지식인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지식인의 역할은 사실적 인과관계를 잘 따져서 ‘내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국민과 나라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겁니다. 훈련받은 능력에 따라 생각하고 연구해서 결과를 보여주는 거죠. 국민을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국민을 대표한다면 지식인이 나라를 통치하지 왜 정치인이 합니까?
그래서 교수들의 최근 시국선언에 부정적이신가요.
내 생각을 얘기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게 국민의 의사라고 주장하는 건 지나칩니다. 저도 언론에 칼럼을 쓰고 의견을 내지만, 제가 어떻게 국민을 대표합니까? 다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제 의견을 제시하는 거죠.
여야와 좌우가 상호공존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념적으로 좌우의 구분이 없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좌에게든 우에게든 대상으로서의 현실은 하나입니다. 현실이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엔 (좌우를 벗어난) 다른 대안이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싫든 좋든 좌우를 하나로 합치고 묶어서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란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산층이 많아야 사회가 튼튼하다고 하는데 이념적으로 온건한 중도 성향의 국민이 많아질수록 사회가 건강해질까요.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안정성이 있다고는 할 수 있죠. 사회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현실적 방안일 겁니다. 안정성은 현실 긍정적인, 보수적인 생각인데 어찌 보면 사람 사는 데 가장 근본적인 거죠.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보수적인 거 아닙니까?
철학적인 말씀 같은데 인간 삶에서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거군요.
추상적으로는 죽는 게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를, 더 잘살기를 바라고 그런 전제 아래서는 삶의 안정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전통적으로 정치를 잘하는 걸 ‘민생안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 사회에선 타협과 중도를 이야기하면 좌우 극단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로 몰아붙입니다.
사실 안정적인 삶이란 것 자체가 정치와의 거리를 말합니다. 행동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의 삶이 정치화해야 한다고 보지만, 보통 사람들은 안 그래요. 농사꾼들이 임금이 누군지 모르는 게 태평성대라는 고사도 있잖아요.

그럼 결국은 목소리 큰 사람들에게 끌려다닐 텐데요.
조선시대에도 1천명 정도의 지식인이 단합하면 국가가 흔들흔들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죠. 하지만 이들이 모든 이의 의사를 대표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정치적 자산과 식견이 있고 그걸 정책화해낼 능력이 있더라도 그걸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으로 단정하지 않는 겸손함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불안한 건 변화가 너무 큰 것도 또 다른 원인입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급격히 변하니 다들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그런 경험 때문에 지나치게 정치화돼 있어요.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도 당위적 주장들이 많이 나왔죠.
촛불시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국민 의사를 표현하는 부분이죠. 국민 전체의 의사가 아니더라도 그런 우려를 전달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건 결국 시위대가 아니라 국가가 하는 거죠.
결국 결정은 제도권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건가요.
그런데 지금은 국회가 논의를 다 포기한 상태여서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죠.
직접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으시는군요.
직접민주주의는 항의는 할 수 있지만 정책을 만들 수는 없어요. ‘노(No)’라고 하는 건 직접민주주의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럼 어떤 대안을 내놓을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등의 적극적인 일은 할 수 없는 거죠.
급진적인 해결책을 안 믿는 것 같습니다.
합리성에 입각하라는 거죠. 합리성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걸 지속적인 현실이 되게 만드는 겁니다. 합리성은 될 수 있으면 평화적이어야 하지만 평화적인 수단을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상적인 목표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죠. 계속적인 노력이 저절로 움직여지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하고요. 뭔가를 고친다고 할 때 어떤 때는 혁명적 계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합리적인 현실이 되려면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하는 거죠.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독일 같은 데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시장 체제’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되, 부작용들을 국가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결한다는 거죠.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복지체제를 갖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드느냐는 거죠.
대담과 정리·김종혁(중앙일보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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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