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난 2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국보 1호 숭례문 자리에서 숭례문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착공식이 거행됐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사건이 일어난 지 꼭 2년 만이다. 당시 방화로 2층 문루(門樓)의 90퍼센트와 1층 문루의 10퍼센트가 소실되면서 숭례문이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겠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조사 결과 1층 문루가 거의 온전하고 석축과 홍예문이 훼손되지 않아 국보 1위 지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지난 2년간 고증 등 복구작업을 준비했다.
착공식 행사는 지난 2년간의 복구 준비 경과보고, 착공을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의식인 ‘고유제(告由祭)’로 이어졌다. 고유제는 조선왕조의 각종 국가의례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중 좋은 일에 치르는 길례(吉禮) 편의 제사 절차에 근거해 진행돼 숭례문 복구에 두는 의미를 실감케 했다.
착공식은 대목장 신응수(68) 씨의 주도로, 해체되지 않은 숭례문 누각 상단을 가로지른 뼈대인 ‘평방(平枋)’을 주요 인사들이 광목천을 천천히 당기며 해체하는 시연으로 공사의 시작을 알리면서 절정을 이뤘다. 조선 태조 때 지어진 숭례문을 대규모로 개·보수하는 것은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 1961~63년 해체 복구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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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복구는 2012년 말이나 돼야 끝난다. ‘전통 기법으로 다시 태어나는 숭례문’을 내세운 문화재청은 복구를 앞당기기 위해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국민의 염원을 담은 재래식 전통 기법으로 진행해 복구의 의미를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장에서 일하는 장인과 인부들은 모두 한복을 입는다. 복구를 맡을 5개 분야 장인들은 대목 분야 신응수 씨, 단청 분야 홍창원 씨, 석공 분야 이재순 씨와 이의상 씨, 기와 제작 분야 한형준 씨, 기와 덮기 분야 이근복 씨다.
이들 장인 중에서도 남다른 감회 속에 착공식을 지켜본 이가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기능 보유자로 ‘도편수(대목 분야를 총지휘하는 사람)’를 맡은 신응수 씨다. 스무 살 때인 48년 전 풋내기 목수로 숭례문 복구에 참여한 데 이어 이번에는 도편수를 맡아 숭례문과 재회하기 때문이다.
도편수는 숭례문 복구작업의 ‘핵심 장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궁궐과 사찰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이 목조여서 도편수의 존재 의미는 컸다.
조선 초기 숭례문을 축조한 대목장 중에는 정5품 벼슬을 받은 이도 있을 정도. 이런 중책을 맡은 신 씨에게 숭례문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스승을 만나게 한 곳이다.
충남 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16세 때 상경한 그는 목수 일을 시작한 지 5년째인 1962년 그를 지도하던 이광규 선생의 부름으로 숭례문 복구공사 도편수이던 조원재 선생을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1962년에 착수된 숭례문 보수공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숭례문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기왓장이 흐트러지는 등 겉보기에도 크게 훼손됐다’는 보고를 받고 보수를 지시해 시작됐다. 신 씨는 당시 숭례문 공사를 하는 동안 도편수 조원재 선생의 집에 들어가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전통 기법을 배우게 됐다. 국내 대목장 계보는 1906년 덕수궁 중건과 창덕궁 내전 복구에 참여한 최원식 선생을 1대로, 조원재(2대), 이광규(3대)에 이어 그가 4대째다.
도편수 신 씨는 1975년 수원성곽 복구공사에서 도편수를 처음으로 맡은 이후 경주 안압지 내 건물을 복구했으며, 창경궁과 창덕궁의 주요 전각 보수 정비 공사를 지휘하는 등 1백 건이 넘는 복구작업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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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에 쓸 소나무는 이미 확보했다. 재질이 좋기로 정평이 난 강원 삼척시 미로면 준경묘 일대의 금강소나무 10그루와 국민들이 기증한 소나무 21그루를 들여와 경복궁 부재보관소에서 건조 중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숭례문 문루에 사용된 목재는 모두 13만1천4백93재(材·1재는 3센티×3센티×3백60센티)이며, 이 중 약 36퍼센트인 4만7천6백9재가 화마(火魔)의 피해를 봤다. 이 중 국민기증 등으로 지금까지 확보된 소나무는 총 2만4천 재에 달한다. 또 지난해 불탄 목재를 조사해 A, B, C, D로 등급을 매긴 결과 재활용할 수 있는 B등급 이상이 33퍼센트로, 1만5천7백여 재를 다시 사용할 수 있어 목재 확보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는 재목 가운데 불에 타거나 충격을 받았어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으면 때워서라도 쓸 예정이다. 이를 통해 옛 장인이 어떤 나무를 쓰고 어떻게 깎았는지, 나무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귀중한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것. 숭례문 화재가 국가적 불행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와 대목장 계보를 이으려는 제자들에게는 옛 장인들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사찰이나 궁의 복구공사를 하다 보면 수많은 고증자료를 참고해야 하고 뒤늦게 추가 자료가 나오면 재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도 숭례문은 1962년 중수 공사 때 나온 수리보고서와 해당 지자체인 중구청이 펴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등이 있으니 당시 모습을 복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3월 말 숭례문 문루 해체작업이 모두 끝나면 그는 전수 조교, 이수자, 전수 장학생 등 10∼20년 경력을 가진 목수 20여 명을 이끌고 치목(治木)작업을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복구작업의 초점은 조선 초기의 간결미가 특징인 숭례문을 1962년 복구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창경궁이나 경복궁 복구공사에도 전통 기법을 활용한 데 이어 숭례문 공사에도 최신 장비는 거의 쓰지 않는다. 재목을 다듬고 손질할 때는 도끼, 큰자귀(나무를 다듬는 연장), 내릴톱(나무를 세로로 쪼갤 때 쓰는 연장) 같은 전통 도구를 사용하고, 목재를 끌어올릴 때도 전통 운반도구인 거중기를 이용한다.
그의 제자들 중 대부분은 창경궁 문정전 복구공사(1985년), 경복궁 강녕전 복구공사(1991∼95년) 때도 도끼와 큰자귀, 손대패 등을 주로 쓰는 전통 기법으로 공사를 한 경험이 있다. 이것이 그가 숭례문 복구작업에 자신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 씨는 숭례문이 화염에 휩싸인 2008년 2월 10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경복궁 복구공사를 하던 그는 이날도 경복궁에서 늦게까지 작업을 하다가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금세 진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각 부분이 삽시에 전소하는 것을 보며 가슴을 쳐야 했다. 그로부터 2년 만에 복구 현장에 선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숭례문을 복구하겠다며 시민들에게도 계속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우리 전통 목재 건축은 ‘정성’ 그 자체로, 대들보에서부터 지붕, 추녀 등을 잇는 모든 부속물들을 못 하나 없이 일일이 손으로 깎고 밀고 올려야 합니다. 장인으로서 그러한 노력과 정성을 숭례문에 쏟겠습니다. 시민들께서도 화재 때 안타까워하던 그 마음 변치 말고,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글·박태해(세계일보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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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