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14개월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실무협상을 이끈 김종훈 수석대표는 외교통상부 내의 대표적인 통상 전문가다. 1994년부터 3년간 주미대사관에서 경제참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외국산 담배 개방 협상, 미국산 냉동육의 유통기한 문제와 통신 협상 등에 모두 참가했다.
이때 이미 외교적·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섬세하고도 정교한 ‘협상의 기술’을 몸에 익혔다.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패러글라이딩 같은 스릴 넘치는 스포츠를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외교통상부 내에서도 알아주는 ‘가수’다. 트로트부터 프랑스 가수 이브 몽탕의 샹송까지 온갖 노래를 잘 부르는데, 단골 애창곡은 이브 몽탕의 ‘고엽’이다. 부인 김현지 씨도 결혼 전 남편의 노래 솜씨에 반했다는 점을 고백할 정도다.
그는 FTA 타결 직후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마음으로 마지막 협상에 나섰다고 밝히기도 했다. “뭘 주고받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에게 ‘한국은 앞으로 개방과 경쟁으로 간다’는 큰 메시지가 전달된 게 제일 중요하다”며 협상 소감을 정리했다. 그는 ‘미국에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비판세력의 주장에 대해서도 자신감 있는 반론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가져가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심이 컸던 쇠고기도 “앞으로 풀어 보자”는 선에서 합의했을 뿐 확답을 해주지 않았다. 농업에 있어서도 한국의 민감 품목은 전부 10∼15년의 시간을 벌은 것이 이번 FTA 협상의 큰 성과다. 그는 여전히 할 일이 산적해 있고 피로한 심신을 아직 추스르지 못했다. FTA 과정상의 핫 이슈, 협상 전략과 인사이드 스토리, 향후 마무리 과제를 들어봤다.

한·미 FTA 타결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2의 개방을 성사시킨 주역의 한 사람으로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은데.
“손익계산도 중요한 문제지만 우리 국민에게 ‘한국은 앞으로 개방과 경쟁으로 간다’는 큰 메시지가 전달된 게 가장 중요하다. 상대에 관계없이 개방과 경쟁으로 간다는 것이다. 최강대국 미국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 있게 가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커진다.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국가의 대사관에서 미국과의 FTA 협상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며 전화가 이어지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협상의 득실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하나.
“우리가 얻은 것이 적지 않다. 웬디 커틀러 미측 수석대표가 떠나며 ‘나는 비행기 타고 돌아갈 때 뭐 가져가냐’고 했다. 단순한 엄살이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미국은 가져가는 게 별로 없다. 쇠고기도 ‘앞으로 풀어 보자’는 선에서 합의했고 농업도 한국의 민감 품목은 전부 10∼15년의 시간을 벌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많이 얻어냈다면 미국이 협상에 동의할 수 있었겠나.
“하나도 안 주고 많이 받아서 좋다는 것은 바른 시각이 아니다. FTA에서는 균형이 맞는 게 제일 좋다. 저쪽은 어차피 상품 시장이 열려 있으니까 물건 팔 수 있는 것은 농산물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쪽 농림부 민동석 차관보와 배종하 국제농업국장이 정말 잘했다.
우리는 미국에 지적재산권, 투자자 보호, 투명성 등을 양보한 셈인데…. 해외 투자를 유치하려면 인센티브는 고사하고 번 돈을 안 뺏어 간다는 보장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히 분쟁해결 절차가 있어야 한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네 업체들이 한국과 교역할 때 절차상 불투명 문제가 많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막판 12시간의 진통이 극심했다. 협상 타결의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당초 시한이라고 한 때까지는 쟁점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물리적으로 깨지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제일 민감했던 농업 쪽은 거의 한 발짝도 못나가고 있었다. 협상 물꼬는 자동차에서 미국측이 승용차 전부 물러주겠다(3000cc 이하 관세 즉시 철폐)고 한 때이다. 그 이후 월요일 새벽부터 우리도 움직여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방송 통신 등 나머지 쟁점을 다루면서 농업도 지킬 것은 지켜가며 협상을 하나하나 진행했다. 그게 돌파구였다.
미국측의 자동차 최초안은 언디파인드(미분류)였다. 계속 미정이었다가 고위급 회담 때 승용차 5년, 트럭 10년(관세 철폐안)을 내놨다. 이 때문에 29일 밤 협상이 결렬되기도 했다. 이어 30일 새벽 저쪽에서 자동차 분야에서 조금 진전된 카드를 내놨다. 양국 대통령이 전화통화를 한 뒤였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버텼다.
미국측이 막판 고위급회담에서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다. 거의 월요일 아침 동이 트면서 마지노선 카드를 보여줬다. 그러기 전에 쭉 이야기하면서 상대편 수를 읽어나가면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면서 막판에 좁혔다.”
일각에서는 이면합의의 존재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면합의 같은 것은 절대 없다. 이번 협상은 초기 단계부터 이면합의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각 분과장과 협상단에 강조하고 약속했었다. 협상에서 논의되고 합의된 사항은 모두 발표한다는 것이 일관된 원칙이다. 협정문과 부속서가 투명하게 공개되면 이면합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명백해 질 것이다.”
미국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했던 부분,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우리측 입장이 대폭 반영된 사안을 꼽는다면?
“픽업트럭이 미국으로선 한국의 ‘쌀’과 같았다. 죽어도 못 준다고 했다. 그러나 픽업트럭 관세를 현행 25%에서 10년 동안 단계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우리는 아직 픽업트럭을 안 만들고 있지만 5년 정도면 새로 생산라인을 깔 수 있다.
그때면 관세가 12.5%로 떨어진다. 미국 픽업트럭 시장이 연간 370만 대이고,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이 15%인데 앞으로 큰 시장경쟁력을 확보하게 됐다.”

협상의 실마리는 어떻게 풀었나. 그 극적인 순간을 들려달라.
협상 성공 전략이 큰 화제다. 한·미 FTA 사례는 향후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도 유익한 교훈으로 남을 것 같다.
“하나 예를 들자면 지난해 12월 미국 몬태나에서 5차 협상을 할 때 무역구제 비(非)합산 조치(반덤핑 조치 발동을 위한 산업피해 판정 때 한국산은 분리해서 평가)를 내놓으라고 하니까 미측이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 속으로 ‘아, 됐다’고 생각했다. 줄기차게 요구해 값을 엄청 키워 다른 것이랑 주고받기해야겠다 싶었다. 결국 이 덕분에 미국이 요구한 신약 최저가 보장을 거부하고 투자자 - 국가간 소송제도에서 부동산과 조세정책을 제외할 수 있었다. 다만 비합산 조치 값을 잔뜩 올려놓았을 때 문건 유출 사건이 터져 미국이 우리의 전략을 간파했다. 결과는 생각대로 됐지만 당시는 굉장히 화가 났다.
마지막 협상을 서울에서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는데 이는 작전이었다. 지난해 3월 웬디랑 처음 협상 일정을 짤 때부터 계산에 넣었다.”
14개월 동안 협상을 이끌면서 희망과 좌절의 불연속선을 넘나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14개월 내내 희비의 교차, 낙심과 용기 사이를 배회했다. 출근할 때는 희망이 생기지만 저녁에는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깊은 근심에 빠졌다. 그래도 협상장에서는 여차하면 깰 수도 있다는 걸 몸짓으로나 표현으로나 전달했다. 다만 내 직분은 ‘딜 메이커’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런 점을 드러내면 약점 잡히니까 상대에게는 협상을 깰 수 있다고 말했다. 타결 직후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따로 만났다. 악수를 하고 서로 못 본 척했지만 본부장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더라. 나도 눈물이 났다.”
한·미 FTA의 발효를 위해 상당수, 심지어 160개 조항의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농업분야 등 4곳은 덜 끝났지만 나머지 15개 분야를 집계한 결과 15개 안팎의 법률 개정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한·미 FTA로 인해 개정해야 할 법률은 20개 안팎이며 개정해야 할 고시나 시행령 등까지 합쳐도 모두 40개 정도다. 지나친 걱정은 기우다. 큰 문제 없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기홍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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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