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빙상 담당 기자로서 2007년 3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피겨 스케이팅 세계선수권은 잊지 못할 대회였다. 당시 17세였던 김연아(19)가 세계 피겨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체육관에서 열린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 김연아가 출전해 여자 싱글 역대 최고점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였다.
주니어 무대를 평정한 김연아는 2006~2007 시즌부터 성인 무대로 올라섰다. 첫 출전한 그랑프리 대회인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3위를 차지하며 성인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가능성을 보인 김연아는 두 번째로 출전한 ‘트로피 에릭 봉파르(파리)’에서 1위를 차지하며 그랑프리 시리즈 상위 6명에게만 주어지는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 자격을 따냈다.
그리고 2006년 12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전 대회 우승자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쳤다. 2007년 1월 정밀진단 결과 허리 디스크 초기 판정을 받은 것. 국내 대회와 중국 창춘 동계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모두 단념하고 재활 치료에 몰두했지만 허리 통증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2월엔 세계선수권을 며칠 앞두고 꼬리뼈에 탈이 났다.
“100년 넘는 여자 피겨 역사에 새 장 열었다”
연습조차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대회 취재를 위해 도쿄에 와 있던 한국 기자들은 김연아에 대한 우승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김연아가 끝까지 연기를 마칠 수 있기만 바랐다.
그리고 운명의 3월 23일. 관중석을 가득 메운 6800여 명의 시선이 흰 빙판 위로 쏠렸다. 36번째 선수 김연아가 마침내 무대에 선 것이다. 빨강과 검정이 어우러진 강렬한 느낌의 의상을 입은 김연아가 영화 ‘물랭루즈’의 삽입곡 ‘록산의 탱고’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통제를 맞고 출전했다는 김연아의 연기는 신들린 무희 같았다. 강렬한 표정, 한 치 오차도 없는 동작과 점프…. 연기 중반부터는 관중석에서 이날 처음으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분 40여 초의 연기가 끝나고 전광판에 뜬 채점 결과는 71.95점.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역대 최고 점수였다.
김연아의 연기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피겨가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른 나라 기자들도 마찬가지. 로이터통신의 알라스타마 히머 기자는 “믿을 수 없는 연기, 환상적인 연기”라고 했고, LA타임스의 필립 허시 기자는 “2분 40여 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100년 넘는 여자 피겨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썼다.
이후 1년 9개월이 지났다. 성인 무대에서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고 있는 김연아는 캐나다인 코치 브라이언 오서를 따라 훈련 본거지를 캐나다 토론토로 옮겼고, 최근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 참가를 위해 6개월 만에 한국에 왔다.
이번 대회는 김연아가 더 성숙했고 더 발전했음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무엇이 지금의 김연아를 있게 했냐고.
피나는 노력과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제대로 된 피겨 경기장 하나 없고, 세계 무대 진출 경험이 있는 지도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피겨의 변방 중 변방에서 김연아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김연아를 키운 ‘8할’은 어머니 박미희(50) 씨다. 박 씨는 김연아가 언젠가 세계적인 피겨 선수가 될 것을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이 딸에게도 전해져 김연아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됐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혹독한 훈련을 소화했다. 김연아는 전용 연습장소가 없어 사람이 없는 새벽과 한밤중에 아이스 링크를 이용했다. 진심으로 바라고 전력투구하면 꿈에 다가가게 마련이다.
김연아는 그 믿을 수 없는 쇼트프로그램 연기를 펼친 대회가 끝나고 만났을 때 이렇게 얘기했다. “가끔 연기 중에 반쯤 미친 상태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쇼트프로그램에선 내내 그 상태였다”고. 얼마나 연기에 몰입했던지 당시 체육관이 흔들릴 만큼 박수를 보내던 관중의 반응도 전혀 몰랐다고 했다. 무아지경의 경지를 체험한 것이다.
그때보다 나이도 더 먹고 키도 좀더 자란 김연아는 성인과 10대 소녀의 중간지점쯤에 있다. 새로운 시즌을 맞아 김연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갈수록 ‘행복한 스케이터’가 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니어 시절 김연아의 얼굴은 어두웠다. 인간관계에 익숙지 못한, 닫혀 있는 그런 느낌. 하지만 이번 시즌 김연아는 ‘미소 천사’로 불릴 만하다. 얼굴에 여유가 흐르고 웃음도 많아졌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어떤 것을 추구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김연아가 던진 말들에서 찾을 수 있다.
피겨는 독특한 스포츠다. 경쟁해야 하는 스포츠의 틀 안에 있지만 한편으로는 예술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예술은 일단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2007년 3월 도쿄 대회가 끝나고 김연아에게 물었다. “프리스케이팅에서 순위가 밀려 3위로 끝났는데 아쉽지 않느냐”고. 김연아는 “오히려 잘된 것 같다. 첫 시즌부터 정상에 오르면 그 다음엔 1위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할 것 같다. 지금은 도전자의 위치가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연아가 덧붙인 말을 잊지 못한다.
“내가 추구하는 피겨는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거예요.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 지금은 그게 가장 중요해요.”
“자신만의 완벽한 세계를 향해 달린다”
이번 시즌도 절반 정도 지났다.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들고 나온 김연아에겐 또 한 번의 성공적인 시즌이다. 두 번의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좀 더 과감하게 승부수를 띄운 일본의 아사다에게 3년 만에 우승을 내줬다.
김연아는 이번에도 비슷한 대답을 했다. “대회 3연패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쉽지 않다”고. 쇼트프로그램을 1위로 마치고도 라커룸에 처박혀 눈물을 쏟은 이유에 대해선 “한국 팬들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실수를 해서 속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리스케이팅이 끝나고 1위에서 2위로 미끄러진 다음날 김연아의 표정이 전날보다 훨씬 밝았다. 홀가분하고 환한 모습으로 “피겨 연기에서 실수는 있게 마련이다. 다음엔 더 잘하겠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여전히 자신과 싸움을 하고 있다. 아사다나 다른 선수들은 그저 피겨 스케이팅을 함께하는 동료일 뿐이다. 김연아의 시선은 자신만의 완벽한 연기 세계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특별하다.
지난해에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경제위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김연아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더욱 빛을 발했다. 외환위기 때 박찬호나 박세리가 그랬듯 국민에게 웃음을 되찾아줬다. 그리고 희망을 보여줬다.
김연아는 온몸으로 이렇게 말한다.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결과를 받아들여라. 결과가 안 좋으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실수는 있게 마련이라고. 다음엔 더 잘할 거라고.”
글·김성규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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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