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검거, 영화 ‘시민덕희’ 실제 주인공 김성자 씨
“○○은행 ○○지점 박 대리입니다. 본인 명의로 압류 비용 다시 송금해주셔야 해요. 제 사원증 사진 하나 보내드릴게요. 빨리 입금하셔야 합니다.”
영화 ‘시민덕희’의 실제 주인공인 김성자 씨는 2016년 1월 보이스피싱 사기범에게 속아 넘어갔던 상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시민이 끈질긴 추격 끝에 중국에 있던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을 잡아낸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낮에는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고 밤에는 부업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김 씨는 2012년 5월 9일 일하던 공장에서 3.5m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떨어진 장난감을 주우려고 몸을 내밀던 아들이 건물 밑으로 추락하려던 순간 김 씨가 몸을 던져 아들을 잡았다.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지만 김 씨는 이 사고로 온몸에 골절상을 입고 3년간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 씨는 당시 안전망을 임의로 치워둔 건물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 지난한 법정다툼이 이어지던 2016년 1월, 김 씨는 ‘압류 비용을 내라’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사법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소송 중 압류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마침 보이스피싱범도 내 재판 관련 사항을 다 알고 있기에 진짜인 줄 알았죠. 그들이 보내온 가상계좌로 1600만 원을 이틀에 나눠 이체했어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이스피싱범은 ‘엉뚱한 곳으로 돈을 보냈다’, ‘전산오류가 있었다’ 등 핑계를 대며 돈을 더 요구했다. 심지어 은행 대출까지 연결시켜줬다. 그들의 말대로 은행 담당 직원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신용 조회’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다. 사원증을 보여주며 신분을 확인시켜줬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총 3200만 원을 보냈다. 그리고 대출금과 선입금을 돌려받기로 한 날 모든 연락이 끊겼다. 은행을 찾아간 김 씨는 그제야 자신이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너무 억울했어요. 경찰서에 찾아가 신고했지만 못 찾는다는 말만 했어요. 너무 분해서 욕이라도 하려고 일전에 걸려왔던 번호로 전화했죠. 전화번호는 살아 있는데 제 전화는 안 받기에 가게 전화나 다른 사람 전화를 빌려 계속 걸었어요. 전화를 받으면 욕을 쏟아부었죠.”
속이 터져나갔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 끙끙 앓았다. 술과 수면제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할 정도였다.
“매일 울면서 돈을 돌려달라고 빌었어요. 어느 날은 세탁소에 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여덟 살 아들이 울면서 깨우더군요. 엄마 죽지 말라고. 정신을 차리고보니 세탁소 천장에 달린 압축봉에 스카프가 걸려 있었어요. 아찔했죠. 그날로 수면제를 다 갖다버리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사기를 당하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밤, 김 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나 좀 살려달라, 나도 잡혀 있다, 총책의 정보를 줄 테니 신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또 사기를 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한바탕 욕을 퍼붓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조직원으로부터 계속해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총책의 실명과 나이, 설을 앞두고 한국에 귀국한다는 정보까지 줬다. 김 씨는 의아했다.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묻자 조직원은 영화 ‘시민덕희’의 대사 그대로 “김성자 씨가 가장 집요했고 돈을 가장 빨리 보낸 사람”이라며 “뭔가 해낼 것 같다, 자신을 믿어달라”고 말했다.
이후 조직원은 보이스피싱 피해자 명단을 보내왔다. 정보를 전해받은 김 씨는 그길로 당장 경찰서로 갔지만 담당 경찰은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아줌마, 또 사기당한 거예요”라는 말만 반복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김 씨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 혼자서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조직원에게 근거지와 총책의 사진, 한국 은신처 주소는 물론 조직원 본인의 자필 범행 진술서까지 받아냈다. 그리고 ‘총책이 2월 8일 10시 25분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과정에서 김 씨는 국제전화 비용만 70만 원을 썼다.
정보가 쌓인 김 씨는 또다시 담당 경찰을 찾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후 영화에서는 중국으로 직접 총책을 잡으러 가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총책의 한국 은신처로 가서 잠복을 했다.
총책이 한국에 오기로 한 그날 밤, 잠복 중이던 김 씨는 총책이 공항에서 잡혔다는 뉴스를 들었다. 결국 김 씨의 제보로 총책이 검거된 것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검거 과정에서 72명이 1억 3500만 원의 피해를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추가 범행 대상이었던 234명의 피해도 예방할 수 있었다.
보이스피싱 총책 검거 이후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나?
없었다. 내가 전화했더니 조사 중이라고, 연락준다고 하고는 끝이었다. 총책을 잡았으니 내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범죄은닉금으로 잡혀 있어 받을 수 없다고만 했다. 나중에 언론 보도를 보니 보이스피싱 총책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6명의 직원까지 다 잡았더라.
피해금 3200만 원은 당장 못 받는다 해도 보이스피싱 범죄를 신고하면 받는 포상금이 있지 않나?
당시 경찰서에 포상금 1억 원을 준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범인을 잡으면 준다기에 한참을 기다렸다. 상반기에 나올까, 하반기에 나올까 마냥 기다리다 경찰서에 전화했다. “깜빡했다”며 통장을 들고 오라고 하더니 100만 원을 주겠다고 해서 거부했다. 대신 대한민국 경찰청장의 표창장을 달라고 요구했다. 담당 경찰이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나?
1억 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내 돈 3200만 원도 돌려달라고 당시 청와대, 경찰청, 법무부, 국민권익위원회, 인권위원회 등에 진정서를 넣었다. 범인을 잡아줬는데 왜 돈을 돌려주지 않는지 묻고 따졌다. 그때마다 절차상 그렇다, 내부규정이라 어쩔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답답했다.
검거된 총책 측에서 합의금을 제시했는데 거부했다고 들었다.
총책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에 있을 때 면회도 일곱 번이나 갔다. 내 돈 어떻게 할 거냐 따졌더니 총책이 자기도 1억 원 넘게 뜯겼다고 말하더라. 화가 나 욕을 쏟아부었다. 다섯 번째 면회를 갔을 때는 ‘누가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냐’고 되레 큰소리치더라. 억울해 눈물이 났다. 어느 날은 편지를 보내 합의를 요구하더라. 자신이 총책이 아니라고 말해주면 500만 원을 주겠다고. 나중에는 1000만 원을 제시했지만 합의해주지 않았다.
피해금을 돌려받고 합의를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사람한테 당한 피해자만 수십 명이다. 액수가 적어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 합치면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본다. 피해자들 중에는 생계를 잇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누군가는 100만 원이 없어 힘겹게 살 수도 있다. 내가 합의해주면 다른 피해자들이 억울하지 않겠나. 내 자존심이다. 나는 자식들 앞에서 떳떳한 엄마이고 싶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많은 이들이 김성자 씨의 활약을 알게 됐다.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
‘멍청하니까 보이스피싱을 당하지’, ‘멍청하니까 경찰이 우습게 보지’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응원해줘서 감사했다. 담당 경찰은 연락이 없었지만 다른 경찰들이 견뎌줘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무엇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자주 나를 찾아온다. 누리소통망(SNS)으로 많은 연락을 받는데 최근에는 보이스피싱으로 16억 원을 뜯긴 사람의 자녀가 연락해 한탄하기도 했다. 도와줄 방법이 없어 안타까웠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하고 8년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회복됐나?
어떤 사람들은 보상을 다 받아놓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아직도 경제적 회복이 덜 됐다. 범인을 못 잡았으면 모를까 범인을 잡아 구속시켜놓고도 상황 해결이 안된다는 게 절망스럽다. 내가 사기를 당한 3200만 원은 모두 주변 사람들에게 빌린 돈이다. 적금을 해지하고도 500만 원이 모자라 동생에게 빌렸다. 하루 2~3시간 자면서 일만 했다.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이 검거된 지 8년이 지난 2024년 8월, 김 씨는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보이스피싱 신고 포상금 5000만 원을 받았다. 공익증진 기여를 높게 평가해 내린 상이다. 김 씨는 “이번 포상금 지급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그간의 고생도 보상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그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 씨는 지금도 포상금 1억 원에 대한 민사소송과 원금 반환에 대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포상금 5000만 원 중 절반 이상을 변호사 선임에 썼다. 그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나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판례를 남기고 싶다. 예전에는 나 홀로 맨바닥에 있었지만 지금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응원해준다.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당차게 싸워나갈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서경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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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