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유 앤 잇>의 한 장면
아시아 사로잡은 K-뮤지컬
2021년 10월 3일 대만 남부 도시 가오슝에 있는 한 극장. 공연장 안은 뮤지컬 〈愛AI妻〉(My Endearing Wife,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첫 무대를 보러 온 관객들로 북적였다. 공연 전 주에 좌석 50%까지 관객 입장을 허용했던 거리 두기 방침이 이 주부터 완화돼 객석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이 작품은 대구 북성로에서 주조 사업을 하는 남자가 아내를 잃은 슬픔에 갇혀 살던 중 아내와 똑같은 인공지능(AI) 로봇을 만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유 앤 잇〉(You&It)이 원작이다. 대구를 기반으로 뮤지컬을 제작한 EG뮤지컬컴퍼니의 〈유 앤 잇〉을 눈여겨본 대만 토털뮤지컬씨어터가 판권(라이선스)을 수입했다.
대만 버전 〈유 앤 잇〉은 조기 매진돼 공연을 한 회 더 늘릴 정도로 현지 관객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 “주제가 좋습니다” 각종 누리소통망(SNS)에는 #愛AI妻 해시태그가 달린 관객 감상평이 속속 올라왔다. 이 작품은 2022년 5월 열릴 가오슝 페스티벌 초청작으로 선정됐다.
▶<愛AI妻>이란 제목으로 대만에서 공연한 <유 앤 잇>
라이선스 수출해 대만 진출한 〈유 앤 잇〉
EG뮤지컬컴퍼니 이응규 대표는 해외 수출 낭보에 더해 대만 관객의 뜨거운 반응에 매우 기뻐했다.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도 국내에서 약 3개월 동안 안정적으로 관객을 동원한 바 있는 〈유 앤 잇〉이 대만으로 라이선스를 수출했다는 소식은 K-뮤지컬이 쓴 또 하나의 주요한 성과다.
공연·예술계에서는 2010년 이후 일본을 시작으로 아시아 시장에서 산업적으로 해외 진출을 꾸준히 시도하는 우리 뮤지컬을 두고 K-뮤지컬이라 부른다. 2021 한국예술연구소와 전통예술원이 공동 주최한 추계학술대회 ‘지속 가능한 예술한류, 그 가능성을 말하다Ⅱ’ 가운데 공연 칼럼니스트이자 월간 〈공연전산망〉의 박병성 편집장의 발표 자료(‘K-뮤지컬 한류, 전망과 과제’)에 따르면 K-뮤지컬을 말할 수 있는 시기는 2010년 이후다.
그는 “그 이전에는 우리 뮤지컬의 아시아 시장 진출이 문화 교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면 2010년 기점으로 산업 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일어난 K-뮤지컬을 향한 관심은 중국으로 퍼졌고 최근에는 대만 시장으로 확대됐다. 2018년 〈팬레터〉와 〈헤드윅〉 투어 공연 시작 후 2019년 〈김종욱 찾기〉, 2020년 〈랭보〉 공연 영상 상영회 등 대만 시장의 K-뮤지컬을 향한 관심은 점차 고조됐다.
〈유 앤 잇〉의 대만 수출 계약으로 EG뮤지컬컴퍼니는 향후 이 작품의 대만 수익의 9~12%를 확보한다. 계약 형태는 논레플리카(Non-Replica) 방식이다. 논레플리카란 원작을 수정, 각색, 번안 가능한 조건으로 현지 정서와 문화에 맞도록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한 저작권을 뜻한다. 이 대표는 계약 과정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계약 당시 이 대표 측에선 현지 정서와 문화에 맞게 내용을 재구성해도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대만 측에서 원작을 최대한 살리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던 것이다. 그는 “우리 뮤지컬이 과거 브로드웨이 등 해외 뮤지컬 원작을 그대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현지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 받았던 것처럼 현재 대만도 우리 뮤지컬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듯했다”고 말했다.
▶<유 앤 잇> 우리나라 포스터
▶대만 가오슝에서 <愛AI妻>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유 앤 잇> 포스터 | EG뮤지컬컴퍼니
보편적 공감 요소, 음악 기술 등 강점
〈유 앤 잇〉은 2018년 대구 북성로에서 초연 및 OST 발매, 2019년 제13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하 딤프) 창작지원작 선정, 딤프어워즈 창작뮤지컬상 수상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한 ‘웰컴 대학로’ 초청공연 등 국내에서 먼저 작품성을 인정받고 관객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배성혁 딤프 집행위원장은 “인공지능, 메타버스(가상현실) 등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만한 소재를 담았다는 점,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사랑을 주제로 한다는 점 등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인데 대만 측도 그런 점에 공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때문에 테크노 장르 음악이 나올 법하지만 이 뮤지컬에서는 특이하게도 클래식한 음악이 삽입됐다. 이 대표는 “음악은 만국 공통어이고 뮤지컬에서는 특히 중요한 요소”라며 “대만 측에 음악을 먼저 보냈는데 우리가 보낸 음원에 매료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2인극 뮤지컬이지만 반주음악(MR)과 라이브밴드 등을 적절히 배치해 더욱 풍성한 사운드를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수출 시장 역할
아무리 좋은 작품도 이를 해외 제작자에게 알릴 창구가 없다면 수출은 요원하다. 이 작품이 대만 수출까지 이어진 데는 딤프 역할이 매우 컸다. 2021년 15회째 열린 딤프는 전 세계 뮤지컬 산업 종사자가 주목하는 아시아 최초 국제 뮤지컬 축제로 콘텐츠 교류와 시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 대표는 “2017년 딤프 창작 지원작이었던 〈기억을 걷다〉를 통해 토털뮤지컬씨어터 관계자 측과 인연을 맺고 지속해서 교류했는데 그 덕에 이번 작품 라이선스 계약도 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딤프는 뮤지컬 제작자에겐 큰 기회를 마련해주는 중요한 자리”라며 “신작 뮤지컬 공연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뮤지컬 관계자 및 프로듀서와 교류의 장을 형성하는 주요한 축제”라고 강조했다.
실제 딤프를 통해 15년간 약 60개 신작 뮤지컬이 중국, 일본, 대만 등에 진출했다. 한편 〈유 앤 잇〉은 현재 대구문화재단 랜선프로젝트 사업 지원으로 웹 뮤지컬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愛AI妻>이란 제목으로 대만 관객들과 만난 <유 앤 잇>의 공연 장면 | EG뮤지컬컴퍼니
해외 진출 돕는 공공 지원도 의미
현재 아시아 뮤지컬 시장은 우리에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무대다. 이 대표는 “조명, 음악, 편곡 등 K-뮤지컬 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높아졌는데 중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에서 이런 기술과 노하우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강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시아를 비롯한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공공 영역 역할도 중요해졌다. 딤프가 수출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한다면 문체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중·소 규모 창작 뮤지컬 제작자에게 공연·예술 저작권 수출 등 보다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창구가 됐다. 이 대표 역시 다른 작품의 상업화를 위해 예술경영지원센터와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 중이다.
그는 “창작자 입장에서 콘텐츠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지만 수출 등 예술 경영 분야는 낯선데 센터가 운영하는 투자, 저작권 수출 등 유의미한 프로그램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김청연 기자
▶(왼쪽부터) 2021년 일본 <마타하리>, 2022년 일본에서 공연 예정인 <웃는 남자> | EMK, 뮤지컬컴퍼니 2017년 일본에서 공연한 <프랑켄슈타인> | 뉴컨텐츠컴퍼니 ,2018년 대만에서 공연한 <팬레터> | 라이브
일본·중국에서 식지 않은 K-뮤지컬 열기
코로나19 상황이지만 일본·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 K-뮤지컬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일본은 2021년 라이선스 형태로 진출한 K-뮤지컬이 총 6편으로 2019년보다 늘어났다. 박병성 <공연전산망> 편집장은 “현재 일본 시장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꾸준히 우리 뮤지컬을 수입해 공연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EMK뮤지컬컴퍼니의 〈마타하리〉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2021년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2022년엔 EMK뮤지컬컴퍼니의 〈웃는 남자〉도 일본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뉴컨텐츠컴퍼니는 일본의 대형 제작사 도호프로덕션과 〈프랑켄슈타인〉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2017년, 2020년 공연한 데 이어 현재 세 번째 공연을 계획 중이다. 또한 〈벤허〉 초연도 추진 중이다. 뉴컨텐츠컴퍼니 측에 따르면 앞선 두 번의 〈프랑켄슈타인〉 공연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한편 중국은 K-뮤지컬이 진출하는 크고 유의미한 시장이다. 중국은 2013년경부터 〈김종욱 찾기〉 〈빨래〉 〈총각네 야채가게〉를, 최근에는 〈미아 파밀리아〉 〈미오 프라텔로〉 〈더 픽션〉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등을 우리나라에서 수입했다. 뉴컨텐츠컴퍼니는 중국에서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의 작품에 각 100만 달러씩 총 200만 달러 규모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향후 〈벤허〉 중화권 진출도 지속해서 추진할 예정이다.
K-뮤지컬 산업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선 아시아 시장에서 우리 뮤지컬이 사랑받는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EMK뮤지컬컴퍼니 김지원 부대표는 “대극장 콘텐츠는 무대, 세트, 조명 등 여러 부문에서 과감하게 투자해 완성도(프로덕션 밸류)가 뛰어나고, 우리 뮤지컬 배우의 실력도 매우 좋아 아시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자국 스태프로 이루어진 대극장 규모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릴 만한 여건이나 수준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형편인데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매우 진취적으로 수준 높은 창작 뮤지컬을 다수 만든다는 데 이견이 없다”고 덧붙였다.
뉴컨텐츠컴퍼니 측은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은 다양한 소재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바탕으로 음악, 무대, 조명 등 기술 부분이 잘 조화를 이룬 작품들을 매해 선보인다”며 “이는 아직 창작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다른 아시아 시장 국가가 볼 때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 공통분모도 이 시장에서 우리나라 뮤지컬이 사랑받는 이유로 손꼽힌다.
배성혁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은 “향후 뮤지컬 시장은 미국, 영국, 한국 3자 체제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며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세계화를 잘하느냐에 따라 K-뮤지컬이 문화 산업으로서 얼마나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