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기반 메타버스 ‘제페토’를 이용해 회의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 한겨레
어디서 어떻게 활용되나?
미국 작가 닐 스티븐슨이 1992년에 발표한 공상과학(SF) 소설 <스노우 크래쉬>에서 메타버스라는 말을 최초로 썼다. 디지털 분신을 뜻하는 ‘아바타’도 그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지역 갱단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일하는 시간제 피자 배달부지만 이어폰과 고글 안경으로 컴퓨터가 만든 메타버스에 들어서면 뛰어난 해커이자 검객으로 활약하는 아바타로 변신해 악당들을 물리친다.
이처럼 메타버스는 현실과 다른, 상상으로 그린 가상세계다. 하지만 현실과 완전히 다르거나 동떨어진 허구라면 의미가 없다. 오히려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빠른 발달에 힘입어 현실과 가상이 상호작용 하면서 끊임없이 융합할 공간이 생겼다. 학계에서는 메타버스의 기능적 특징으로 ‘현실과 가상의 공진화’를 꼽는다.
현실과 가상의 융합과 공진화가 이뤄지려면 현실의 사회·경제 환경과 최대한 유사하게 호환할 기술을 구현해야 한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를 통해서 구현된 초기 메타버스는 주로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정보 수집과 소통을 위한 창구였다. 나름대로 일정한 편익과 유희를 제공하지만 현실의 삶을 대체하거나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조경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왼쪽)이 6월 10일 경기도 성남시 기업지원허브 5G 테스트센터를 방문해 박정우 서틴스플로어 대표에게 메타버스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새로운 표준
그런데 코로나19 상황이 자연스럽게 메타버스의 영역을 확장하고 진화시켰다.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에서 메타버스 활용이 크게 늘었다. 다양한 메타버스 공간에서 일하거나 학습하며 콘서트, 전시회, 패션쇼, 면접과 신입사원 수료식까지 열린다. 병원 수술 과정을 의료 전용 메타버스에 올려 세계 각국 연구자와 공유하는 사례도 있다. 메타버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새로운 표준(뉴노멀)이 될 듯하다.
메타버스는 디지털 기술의 총체적 결합으로 이뤄진 혁신 기술이다. 5세대(5G) 이상의 초고속 통신망, 인공지능(AI), 대량자료(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등 다양한 디지털 기술의 조합과 산업 간 가치사슬의 융합으로 메타버스 생태계가 구축된다.
그중에서도 핵심 기술은 확장현실(XR)이다. 확장현실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 세계에서 인간의 오감을 통한 경험의 확장을 추구하는 모든 기술과 제품, 서비스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가상융합 기술’로도 불린다.
확장현실 기반의 기술은 전 산업에 걸쳐 디지털 전환의 엔진의 핵심 동력으로 꼽힌다. 생산성 향상뿐 아니라 미래 유망사업 선점 여부는 확장현실 기술 경쟁력에 달려 있다. 이에 따라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엔비디아, 삼성전자 등 전 세계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거대 기업은 예외 없이 관련 기술 개발 투자나 인수·합병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국내외 메타버스 서비스 기업 급성장
메타버스 관련 산업이 앞으로 10년간 급성장하며 경제성장률 제고와 일자리 창출에 톡톡히 기여한다는 전망도 나왔다. 영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컨설팅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관련 시장 규모가 2019년 기준 455억 달러(약 52조 원)에서 2025년 4764억 달러(약 540조 원), 2030년에는 1조 5429억 달러(약 1764조 원)까지 급성장하리라 추정했다. 또 관련 산업에서 2030년까지 직간접으로 창출하는 신규 고용을 2330만 명으로 예상했다.
국내외 주요 메타버스 서비스 기업의 급성장과 파급 영향도 눈길을 끈다. 온라인 게임 포털사업자인 미국의 로블록스(ROBLOX·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는 2021년 3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전 세계 이용자들에게 온라인게임뿐 아니라 다양한 가상세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종합 플랫폼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8월 25일 현재 487억 달러(약 56조 원)로 상장 직전보다 기업가치가 열 배 이상 증가했다.
한 달 평균 활성이용자가 1억 5000만 명을 넘는 로블록스에서는 게임, 엔터테인먼트, 커뮤니티,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모든 콘텐츠를 이용자들이 직접 개발해 판매하고 공유한다. 이용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바타 형태로 로블룩스 플랫폼에 들어가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나 주체가 돼 활동한다. 게임을 직접 만드는 이용자만 700만 명이다. 이들이 만든 게임 수만 5000만 개를 넘는다.
로블록스에서 아이템 거래는 ‘로벅스’라는 전용 가상화폐를 통해 이뤄진다. 이용자들은 로벅스를 구매해 게임이나 다양한 아이템을 취득하고, 이를 창작한 개발자들은 로벅스를 받아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 로블록스는 창작·개발자 커뮤니티에 지급한 로벅스를 달러로 환산할 경우 2018년 7180만 달러(825억 원)에서 2020년에는 3억 2870억 달러(3778억 원)로 네 배 넘게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메타버스 산업 선도하는 미국
국내에서는 네이버 계열사인 네이버제트(Z)에서 2018년 개설한 ‘제페토’가 주목받았다. 증강현실 아바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페토는 2021년 6월 현재 기준 전 세계에서 2억 명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국외 이용자가 90%를 차지할 만큼 ‘국경 없는 메타버스’가 형성됐다.
제페토에서는 이용자가 얼굴 사진을 찍으면 인공지능 기술로 닮은꼴 아바타가 생성된다. 표정과 몸짓, 패션, 배경 화면 등 아바타의 모든 개성 요소는 이용자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아바타를 통해 이용자와 음성·문자·이모티콘 등으로 교류할 수 있고, 게임을 하거나 함께 춤을 추는 등 다양한 활동도 즐길 수 있다. 제페토에선 다른 이용자들과 함께 가상세계나 아이템을 만드는 능동적 이용자 수가 약 70만 명이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아이템 수가 200만 개에 이른다. 누적 아이템 판매량도 2500만 개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실적 발표 자리에서 “앞으로 5년 안에 사람들은 우리를 소셜미디어 회사가 아닌 메타버스 기업으로 볼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페이스북은 전 세계에서 메타버스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 중 하나다.
2014년 가상현실 단말기 제조회사 오큘러스를 시작으로 비트 게임스, 스케이프 테크놀로지, 레디 앳 던 등 메타버스 관련 기업을 잇달아 인수했다. 2019년에는 가상현실 전용 소셜미디어 서비스인 ‘호라이즌’을 선보였다. 또 2021년 안에 증강현실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안경’을 출시할 계획이다.
저커버그는 2021년 들어 언론 인터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메타버스로 사업 전환을 내세우면서 “메타버스는 어느 한 회사의 독자적인 공간이 될 수 없고 공공장소와 같이 함께 공존하는 온라인 공간이다. 사람들이 공동으로 상호작용 하는 모든 것이 메타버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메타버스는 어느 한 기업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다른 많은 회사와 제작자, 개발자와 협력해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메타버스 플랫폼 개방형으로 구축
우리 정부의 메타버스 산업 육성 전략도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의 시각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정부가 추구하는 메타버스는 현실과 단절된 세상이 아니다. 국민과 기업이 일상적인 경제, 사회 활동에서 메타버스 기반의 기술과 서비스를 활용하면서 편익을 누리고 혁신을 꾀하자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 2.0을 추진하면서 메타버스를 포함한 초연결 신산업 육성을 디지털 뉴딜 분야의 새로운 과제로 추가했다. 이를 통해 내수 진작에 더해 우리 기업이 확보한 디지털 혁신 기술·서비스가 글로벌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디지털 미래를 선도할 메타버스·클라우드·블록체인 등 초연결·초실감 신산업 분야를 집중 육성한다.
뉴딜 사업 추진 시 일부 사업은 공모를 통해 사업 대상을 선정하고 우수 사례를 발굴·확산하는 등 민간 참여 기회를 확대할 예정이다. 민간 건축물 그린리모델링 지원,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메타버스 플랫폼 구축 등 민간 중심의 디지털·그린 전환을 촉진한다.
이를 위해 메타버스 플랫폼을 개방형으로 구축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개방형 플랫폼에 내재된 데이터나 소프트웨어, 저작·창작 도구 등은 제3의 기업이나 개인이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공립 도시관의 디지털 지식 정보, 3차원 공간 정보, 정밀 도로 지도, 공공 연구개발(R&D) 성과, 산업용 공공데이터 등이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공유할 자산들이다. 개방형 메타버스 플랫품은 메타버스 전문기업 육성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한다. 정부는 2025년까지 연간 매출 50억 원 이상의 메타버스 전문기업 150곳이 육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메타버스 생태계 구축은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를 위해 2021년 5월 ‘메타버스 얼라이언스’라는 민관 협력체가 출범했다. 얼라언스 활동 내용은 메타버스 산업과 기술 동향 공유, 법과 제도 정비를 위한 자문, 기업 간 협업 프로젝트 발굴 및 기획 등이다.
메타버스 전문기업과 개발자 육성·지원 기능을 하는 ‘메타버스 허브’ 운영도 얼라이언스의 업무다. 정부는 얼라이언스에서 제시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원 방안을 모색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메타버스 얼라이언스에 참여하는 기업과 기관은 출범 25곳이었다가 8월 말 기준 202곳으로 크게 늘었다.
김정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프트웨어정책관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비대면 업무를 보고 사회 관계를 형성하고 가상 쇼핑을 하는 등 디지털 융·복합 서비스로 더욱 편리하고 다채로운 일상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