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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쌀술·약술이 흔한 시절이 됐다. 너도나도 '전통주'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 진짜배기 전통주 맛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전통적인 방식을 생략하고 옥수수 전분과 물을 섞어 끓인 뒤 아밀라제를 첨가한 '당화주'(糖化酒)들이 깔렸기 때문이다.
못 입고 못 먹던 시절, 쌀술과 약술은 더 귀했다. 어르신들은 관청의 눈을 피해 곳간이나 헛청, 볏짚더미 깊숙이 술항아리를 감추어 놓고 술을 익혔다. 쌀술을 빚는 것은 물론, 한때는 약주공장도 세원 단일화를 위해 지역[道]마다 한 곳씩만 허가해 주던 시절도 있었다.
어두운 시절을 겪었지만 우리 술은 살아남았다. 충북 진천에 가면 조부(祖父) 때부터 3대째 전통술을 고집하는 술도가가 남아 있다. 본래 건축 엔지니어였던 이규행(44) 씨가 6년 전부터 부친의 뒤를 이어 양조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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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농익어 가는 양조장 발효실은 일흔 나이먹은 술항아리에서 누룩내가 풀풀 난다. 모든 술은 꼬박 열사나흘 발효실 술항아리 속에서 충분히 익는다. 발효실 옆 종국실(種麴室) 흙벽 위에 핀 흑국(黑麴)·백국도 이 양조장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전통 방식 그대로 술 빚는 것도 그렇지만, 1930년에 지었다는 근대 양식의 목조건물(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58호)이 전란과 풍파를 견디고 원형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은 'S주조'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덕산양조장(043-536-3567~8, www.icnj.co.kr)은 1970년대 약주 제조업체 통폐합 시절 오히려 득을 봤다. 충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양조장으로 한때 하루 1만2,000병의 약술이 팔려나가 '양조장=부잣집'이라는 등식을 증명했다. 하지만 약술과 막걸리는 1980, 90년대 들어 맥주와 희석식 소주에 자리를 내주면서 시들해졌고, 양조장들도 설 자리가 좁아져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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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행 씨는 "가장 술다운 술을 빚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물 결정체도 술 만드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는 매일 아침, 전날 빚은 술을 부친의 밥상에 올려 술맛을 '감정'받는다고 한다.
쌀술과 약술은 우리 땅에서 나는 곡물과 생약이 미생물과 어우러진 최고의 음료였다. 뙤약볕 아래서 논일을 하다 새참 때 막걸리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켜는 맛을 어찌 잊으랴. 어린 시절 됫병을 들고 아버지 술심부름을 했던 시골 조무래기치고 술병 주둥이를 빨아보지 않은 이 있을까?
그 시절 고향을 지켰던 양조장은 방앗간·옹기가마와 함께 추억의 보물창고였다. 방앗간과 양조장은 모두 부(富)의 상징이었지만,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간식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때의 추억을 맛보려고 일 삼아 술 지게미를 찾는 분들이 있다”고 이씨는 말한다.
사진·권태균 / 글·김홍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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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