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9월 22일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성화 채화식에서 주용태 서울시 관광체육국장이 첫 번째 봉송 주자에게 성화를 전달하고 있다.│한겨레
10월 4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개막하는 제100회 전국체육대회(10월 4~10일)는 한국 체육 100년의 고난과 영광, 좌절과 전진을 상징하는 스포츠 제전이다. 엄혹한 일제강점기 체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 등으로 대회 중단을 겪기도 했지만, 시설 투자와 유망주 발굴을 통한 한국 스포츠의 국제무대 성취로 어려운 시기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등 근현대사의 격랑을 함께 헤쳐나왔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병행 발전이라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전국체육대회가 지닌 100회의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서울의 상징인 ‘해치’와 친구의 순우리말인 ‘아띠’를 붙여 만든 마스코트 ‘해띠’의 순진한 미소엔 17개 시·도 간 대항전으로 펼쳐지는 전국체육대회의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난다. 타 지역의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반가움과 정성이 배어 있다.
일주일간 서울 일원에서 45개 정규종목과 2개 시범종목(택견·보디빌딩) 등 47개 종목에 걸쳐 펼쳐지는 이번 대회에는 각지의 선수 임원 3만여 명이 참가해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 부문별로 열전을 벌인다. 체조·핸드볼 등 일부 종목은 사전에 경기가 열렸고, 수영은 경기장을 구하기 어려워 김천에서 펼쳐지지만 개막식을 비롯해 주요 경기는 모두 서울에서 열린다. 1955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36회 때부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해 대회 주경기장까지 불을 옮기는 성화 봉송 행사도 이뤄졌다.
다양한 축제·공연으로 분위기 띄워
잠실 주경기장에서 개막식이 열리지만, 9월 21일부터 한달간 다양한 축제와 공연이 서울을 수 놓는다. 특히 9월 28일부터 10월 6일까지 광화문광장에서는 NCT DREAM, 아스트로, CIX, 백지영, 타이거 JK&Bizzy 등이 참여하는 케이팝(K-POP) 서울뮤직페스티벌이 이어진다. 개막식장 분위기의 핵심도 젊음이다.
전국체육대회는 애초 스포츠 행사로 시작했지만, 스포츠가 생활의 일부분이 된 요즘에는 스포츠·문화 축제로 개념을 확장해도 될 것 같다. 장이 서야 사람이 모이듯 전국체육대회는 시·도별 대표 선수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겨루는 국내 최고의 무대로, 경기에 나서는 선수뿐 아니라 팬들도 함께 어울려 즐기는 문화 공간이다. 그럼에도 체육대회라는 본질, 또 1920년 첫 대회 이후 100회 대회라는 역사성은 가볍게 볼 수 없다.
한국 근대체육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억압체제의 질곡을 뚫고 나왔다. 1920년 7월 13일 민족주의 색깔이 강한 조선체육회가 발표한 창립 선언문 내용에는 건강, 개인, 사회 발전 등의 대목이 나온다.
“보라, 반공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 그 얼마나 웅웅하며 표표한고! (중략) 웅장한 기풍을 작흥하여 강건한 신체를 양육하여써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며 개인의 행복을 기망할진대, 그 도 오직 천부의 생명을 신체에 창달케 함에 재하니. (중략) 우리 조선사회에 개개의 운동단체가 무함이 아니라. 그러나 이를 후원하며 장려하여서 조선인민의 생명을 원숙 창달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의 결여함은 (중략) 오인은 자에 감한 바 유하여 조선체육회를 발기하노니 조선사회의 동지 제군자는 그래하여 찬할진저.”
이런 정신은 그해 11월 서울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1회 전조선야구대회로 꽃핀다. 비록 단일 종목 대회였지만 전 조선 차원의 대회였고, 이것이 1회 전국체육대회로 나중에 자리매김한다.
좀 더 다양한 종목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종합대회는 1934년에야 가능했다. 서울시의 제100회 전국체전 누리집을 보면 “한민족 종합체육대회의 효시는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전조선종합경기대회라고 보는 것이 옳다. 축구·야구·정구·농구·육상 5개 종목이 경성운동장 외에 욱천운동장(현 선린중 자리), 배재고보 운동장, 철도운동장 등 이른바 보조 경기장에서 열렸다”고 돼 있다. 이후 종목이 추가되는 등 규모가 커졌지만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1938년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전조선경기대회는 제18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고 적고 있다.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가 시초
전국체육대회가 부활한 것은 1945년. 당시 일제강점기 중단된 대회까지 횟수로 산입하면서 제26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고 육상·축구·야구·배구·정구·럭비·풋볼·탁구·자전거·승마·농구 등 10개 종목에서 경쟁이 펼쳐졌다. 이듬해 1월에는 빙상대회도 부활했고 이 대회가 오늘의 동계 빙상 및 동계 스키대회로 발전했다. 1948년 제29회 대회부터 조선종합경기대회 또는 조선올림픽대회 등의 명칭을 전국체육대회로 고쳤고, 자유 참가제를 시·도 대항제로 바꿨다.
전국체육대회의 방식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없이는 대회 성사가 불가능하다. 지자체는 종목별 선수단을 육성하고, 시설과 재정 투자로 한국 엘리트 스포츠가 만개할 수 있는 토양을 형성해왔다. 기록보다는 시·도 대항전이어서 경기의 긴장도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전국대회라는 국가적 행사를 통해 우수 선수들이 발굴됐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대회에서 한국이 성적을 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전국체육대회를 통해 낙후한 시설을 개선하거나 확충하면서 체육 인프라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은 측면도 강하다. 중앙과 지방의 균등한 체육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대회도 서울 중심에서 각 지역으로 확산됐다.
서울시는 1986년 제67회 전국체육대회,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및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최근 30여 년간 종합경기대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하지만 100회 전국체육대회 개최를 준비하면서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 축전을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박원순 전국체육대회조직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대회는 1920년 제1회 개최지인 서울에서 다시 열린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전국체육대회를 한국 체육 발전의 전환점이 되는, 100년의 미래를 그려나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장에 찾아가 응원도 하며 스포츠의 진수를 느끼는 것 또한 시민의 권리다.
김창금 <한겨레> 기자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