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나라의 위기 앞에 용기를 내달라.”
경북 포항에 사는 손대익(82)씨는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 교장의 이 말 한마디에 군대에 자원했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경북 포항에 있는 중학교에서 6학년(현재 고등학교 3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다. 교장의 훈화를 들은 후 ‘오로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우리 모두 전선으로 함께 나가자!” 반 친구 10명과 함께 학도병에 자원한 그는 대구에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소총을 분해해 결합하기도 하고 제식훈련도 받았다. 하지만 실탄을 쏘는 사격연습은 하지 못했다. 적을 향해 쏘아야 할 총알을 사격연습을 위해 허공에 쏠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게 훈련을 마친 그는 경북 의성 북쪽에 주둔하던 수도사단 제17연대에 배속됐다. 학도병이어서 군번과 계급도 없었다. 그렇게 전투에 참여했지만 정통 학도병이라는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그가 처음 투입된 곳은 ‘기계-운주산 전투지’. 북한군은 이곳을 통해 대구로 진격하려 했고 국군은 이를 저지하려는 격전지였다. 뺏고 빼앗기길 수차례. 여기저기 시체가 나뒹굴고 탄피가 널려 있었다.
필사적인 방어에도 국군의 희생은 늘어만갔다. 주능선이 붕괴되자 부대는 결국 철수했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그는 함께 학도병에 지원한 반 친구 2명을 잃었다. 그는 ‘전우의 원수를 갚겠다’는 적개심에 불타올랐고 고지를 재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다. 고지를 다시 빼앗고 기세를 몰아 계속 전진했다. 하지만 희생은 컸다. 다수의 학도병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가 위급했다. ‘나라부터 구하고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학도병에 지원했다”면서도 “하지만 소총 한번 다뤄보지도 못하고 전방에 배치됐다. 총 한번 제대로 쏴보지도 못한 이들은 원한이 사무칠 것이다. 억울하고 애석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은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적이 얕보지 않게끔 항상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이 넘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63년이 지났다. 박명호(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씨 나이도 올해로 82세가 됐다. 하지만 박씨는 19세 청년 시절 참여했던 전투가 아직도 생생하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한 날,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새벽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뉴스가 계속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포성은 한층 더 가까워졌고 곧 북한군이 나타났다. 이후 그는 북한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틀 만에 탈출했다.
얼마 후 북한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해를 받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의용군에 갔을 때 신었던 신발 등이 문제였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증언으로 곧바로 오해는 풀렸다. 그는 “어찌 보면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만일 그때 인민군에 잡혀갔다면 오늘날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그는 국민방위군이 됐고 박격포 훈련을 받은 후 1951년 5월 정식 군인이 됐다. 육군 9사단 28연대 1대대 2중대 2소대 소총수로 배속된 그는 일명 김일성 고지(현재 충남 계룡산)라는 603고지 탈환전에 참전했다. 603고지는 유엔군이 60회나 공격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포기한 전투지였다. 그런 곳을 그가 속한 대대는 51년 6월 초 단 일격으로 탈환했다.
그 이듬해인 1952년 10월 4일에는 395고지(백마고지) 전투가 터졌다.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백마고지를 지키던 30연대가 병력손실을 크게 입었다. 예비연대로 그가 속한 부대가 투입됐다.
백마고지 쟁탈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395고지는 고지 표고가 1미터 가량 낮아질 정도로 쌍방의 포격이 수도 없이 퍼부어졌다. 포격으로 고지 전체가 하얗게 벗겨져 공중에서 보면 흰말 한 마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발발 10일 후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아군의 희생은 컸다. 전사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3,433명에 달했다.
그는 “나는 아직 살아남아 여든 살이 넘도록 활동하고 있다.
먼저 저세상으로 간 전우들에게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다. 아무쪼록 저세상에서 더 많은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덧붙여 “앞으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안보의식을 강화하는 교육을 보다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작은 바람을 전했다.
인천시 남구에 사는 민경식(82)씨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그중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전투가 있다. 바로 1950년 11월 27일 밤부터 12월 11일까지 14일간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사단과 민씨가 속했던 미 보병 제7사단 31연대가 두만강을 넘어 파도처럼 밀려오는 중공군 약 15만명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펼친 싸움이다. 이 전투로 미군은 6·25전쟁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장진호 전투는 참으로 잔인하고도 야만적이며 참혹한 전투였다. 꿈에도 잊지 못한다. 늘 마음속에 두고 살아왔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 31연대가 북상중인 중공군 8개 사단에 포위당하면서 시작됐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미군 부대는 전투를 감행했다.
그러나 영하 30~40도의 날씨로 중화기와 포가 얼어붙어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부에서는 ‘자체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라’는 명령만 내렸고, 부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이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만무했다. 총공세를 받은 부대는 즉각 후퇴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북한군이 점령한 1221고지를 전면 공격해 통과해야만 했다. 당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하지만 한국인 전우와 함께여서 그는 힘을 낼 수 있었다.
미군 부대인 만큼 한국인은 드물었는데 그마저도 이 전투에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많았다. 한국인은 민씨를 포함해 단둘만 살아 있었다. 둘은 서로 격려하며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1221고지 정상에 다다랐을 때 그의 뒤를 따르던 한국인 전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수백 번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조금만 더 올라왔으면 살았을 텐데….” 아쉬움이 컸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10년, 그는 대전 현충원에서 전우의 이름을 확인했다. 비석 앞에 머리를 숙인 채 나지막하게 전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그리운 전우여. 나만 홀로 살아남아 미안하다. 지금 꿈속에서라도 그대를 만나보고 싶다”며 “낯선 북한 땅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처절하게 싸웠다. 나는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어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귀한 희생은 잊지 말아야 한다”며 “6·25전쟁 참전자들에 대한 감사와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글·박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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