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27세. 미래는 밝았다.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월급도 만족스러웠고, 해외 영업을 담당해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일 잘한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다. 진급도 빨라 입사 동기보다 1년 먼저 대리가 됐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상사들의 시선은 달라졌다. 결혼 준비하느라 조퇴 몇 번 한 게 이유인가 싶었지만 그들은 속으로 ‘곧 그만둘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회사에 복귀했더니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래도 더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부모님께 맡겨둔 아이 문제로 남편과 다툰 다음 날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만 해도 애가 어린이집에 다닐 정도만 되면 다시 회사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인생은 예상과 달리 흘러갔다. 4년 뒤 둘째가 태어났고, 어느새 14년이 지났다.
이태임(45)씨는 첫째가 중학생이 된 지난해부터 새로운 인생을 찾고 있다.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다. 잃어버린 스스로의 인생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그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없었다. ‘마케팅’이란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해당 분야에서 석사 학위까지 딴 ‘학력’은 오히려 방해가 됐다.
“제가 너무 옛 생각만 한 것일 수도 있죠. 젊은 시절 경험을 살려보고 싶었는데 서류조차 통과한 적이 없어요. 대부분 연령제한 규정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눈높이를 낮춰 사무보조를 구하는 회사에도 지원해봤지만 답은 같았어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였어요. ‘이렇게 오래 쉬셨는데 직장 생활은 어렵지 않을까요?’라는 직설도 들었죠.”
예상대로 경력단절의 주원인은 출산과 자녀 양육이었다.
응답자 100명 중 85명이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시(친정)부모 봉양 때문(10명)’이란 답변이 뒤를 이었다. 양육 부담이 지나치게 여성에게 몰린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대로 나타났다. 안미순(44)씨는 “요즘도 그런데 10~20년 전에는 오죽했겠느냐”며 “애를 낳으면 회사를 그만 두는 게 암묵적인 관습”이었다고 말했다.
재취업에 나섰지만 경력단절여성의 대부분은 자녀 양육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취업에 나선 이유 역시 ‘자녀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자기계발’이나 ‘꿈을 찾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있었지만 소수였다. 고은숙(39)씨는 “두 아이 학원비만 월 120만원 정도 쓰는데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부담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재취업 시 원하는 임금은 ‘140만~160만원(42명)’이 가장 많았고, ‘120만~140만원(38명)’이 뒤를 이었다. 근로 시간은 ‘4~6시간(45명)’이 가장 많았다. 가사 부담이 반영된 결과다. 박정선(40)씨는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남편 뒷바라지도 해야 하는데 8시간 이상 일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백선숙(55)씨는 “한창 일할 나이인 청년들만큼 일할 수 있겠느냐”며 “살림살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취업에 나선 경력단절여성들은 재취업을 방해하는 주요인으로 ‘일자리 부족(43명)’과 ‘정보 부족(39명)’을 꼽았다.
결혼 후 12년가량 쉬었다는 한지희(39)씨는 “대학 시절 경영학을 전공해 활용 범위가 넓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맞는 일자리가 없다”며 “충분히 일을 해낼 수 있는데 기업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선영(46)씨는 “내가 가진 능력이 어떤 곳에서 쓰일 수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자격이 필요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정보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안양여성인력개발센터 권은화 교육기획팀장은 “하루 평균 50명 이상이 취업 상담을 위해 센터를 찾지만 구직자가 원하는 직장과 기업이 원하는 지원자를 매칭하는 일이 쉽지 않다”며 “일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경력이나 나이 등 보이는 스펙을 우선시하는 문화에서는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나이 많다’ ‘경력 없다’ 편견부터 없애자
현장에서 만난 경력단절여성들은 재취업 과정에서 경험한 다양한 어려움을 털어놨다. 특히 나이 제한에 얽힌 불만이 많았다. 김선영씨는 “친구가 생산직으로 취업해 일하게 됐는데 자꾸 일이 없다며 쉬라고 해 알아봤더니 젊은 직원들은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며 “‘나이 많다고 무시하는 거냐’며 따졌더니 그만두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박진숙(45)씨는 “예전에 한 기업에서 2차 면접까지 합격한 뒤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라고 해 제출했더니, 아이가 너무 어리다며 탈락시킨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권은화 팀장은 “굳이 나이를 따질 필요가 없는 생산직임에도 40세 연령제한 규정을 두는 기업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무직은 일자리가 없고, 생산직은 처우가 좋지 않은 게 문제다. 부평새로일하기센터 주귀련 과장은 “경력단절여성이 생산직에 취업해 하루 8시간을 일해도 월급 120만원을 받기 어렵다”면서 “잔업을 하지 않으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은데 가사와 양육 부담이 여전한 상황에서 잔업이 쉽지 않다는 점을 회사 측도 고려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박승희(37)씨는 “지금 경력단절여성들은 취업과 싸우는 게 아니라 ‘나이가 많다’ ‘관련 경력이 없다’ ‘전산업무를 못한다’ 등의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다”며 “무조건 못할 것이라고 단정짓기 전에 잠재된 열정을 인정해주는 따뜻한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민숙(47)씨는 “박근혜정부 들어 여성의 재취업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 다행”이라며 “여성들이 엄마와 아내인 동시에 경제활동의 중심축으로서 현장을 누빌 수 있도록 더 살펴달라”고 주문했다.
글·장원석 기자 2013.09.02
설문에 응한 100명의 여성 <가나다 순>
강명숙(48) 강복자(52) 고은숙(39) 공효연(42) 곽지연(34) 곽현정(38) 구미영(43) 구민정(49) 권정아(43) 김기애(34) 김동(44) 김선경(39) 김선미(43) 김선영(46) 김성희(56) 김소영(56) 김수정(34) 김수진(39) 김순영(44) 김영란(49) 김영숙(57) 김운아(36) 김유숙(46) 김은하(39) 김은희(41) 김정란(45) 김정미(41) 김창은(34) 김태화(43) 김현정(45) 김활란(49) 나은숙(40) 남궁지원(34) 모연경(45) 모연향(48) 박겸수(39) 박서녕(55) 박선미(43) 박선주(49) 박성자(49) 박승희(37) 박윤영(29) 박정선(40) 박종애(44) 박진숙(45) 박진영(39) 박찬남(46) 박태은(40) 백선숙(55) 손선진(38) 송명희(49) 신순애(44) 심우연(48) 심은숙(39) 안미순(44) 안미영(38) 안소영(33) 안영주(47) 안정희(46) 양인영(46) 원종현(45) 유선심(49) 윤진경(41) 이경희(42) 이기선(38) 이옥희(55) 이은주(49) 이태임(45) 이해진(35) 임성희(46) 임수정(34) 임슬기(28) 임신숙(44) 임영희(39) 장성분(46) 장점례(47) 전선화(37) 정경옥(53) 정선영(41) 정영순(39) 정은하(45) 정태연(34) 조명덕(44) 조순옥(57) 조혜영(37) 주선희(43) 진경희(54) 진순자(47) 최계숙(48) 최민숙(47) 최숙진(45) 최영애(48) 한경옥(49) 한광연(43) 한소영(41) 한지연(48) 한지희(39) 허정윤(49) 홍혜미(36) 황의순(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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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