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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4일 화요일 오후, 허름한 차림의 노인들이 서울지하철 2호선 당산역 역무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당산역 ‘사랑의 쌀독’에 모인 쌀을 받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다. 역무원들은 지급대장에 수령자의 이름과 날짜를 적은 다음 가져가기 좋게 종이봉투로 포장해놓은 쌀을 내주었다. 1인당 2킬로그램 한 봉지씩이다.
“도움이 되지. 쌀 주는 것만도 도움이 돼요.”
1년 정도 이곳에서 쌀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는 문정옥(81·영등포구 대림동) 할머니는 연방 “도움이 된다”고 고마워했다. 문할머니와 같이 온 이웃 배복순(73) 할머니는 “나는 밥을 못 먹어요. 죽을 쒀먹으니까 (이 정도 쌀이면) 충분해”라고 말했다.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로 하루 종일 북적거리는 서울지하철 2호선 당산역의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철 승강장에 오르는 통로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검붉은 항아리들이 눈에 띈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 할머니들에게 쌀 나눔을 할 수 있게 해준 당산역 ‘사랑의 쌀독’이다.
천경례(53) 당산역장은 “통로에 놓인 항아리는 사랑의 쌀독을 알리기 위한 전시물이다. 진짜 쌀독은 쌀 도난 등을 방지하기 위해 역무실에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랑의 쌀독’은 지난 2009년 4월 1호선 역곡역에서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에 해당되지 않는 도시 빈민, 이른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안한 나눔 운동이다. 역곡역에서는 행사가 끝났으나 2009년 11월 2호선 당산역이 ‘사랑의 쌀독’ 운동에 동참해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호선 동대문역, 3호선 수서역, 4호선 당고개역, 올해 3호선 홍제역이 추가되면서 서울지하철 5개 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맏형 격인 당산역의 경우 대부분 시민 기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역들의 ‘사랑의 쌀독’은 서울메트로 사회공헌기금 ‘매칭 그랜트(matching grant)’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쌀 기부가 급감하면서 당산역 사랑의 쌀독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쌀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사정을 파악해 일주일에 한 차례씩 나눠주던 쌀 나눔을 지난 4월 중순부터 2주일에 한 번으로 줄였다. 쌀이 바닥난 뒤 찾아오는 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취한 부득이한 조치다.

불경기 여파로 쌀 기부 줄어 ‘사랑의 쌀독’ 바닥 드러내
천 역장은 본업인 역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외에 시간이 날때마다 쌀 기증장부를 들여다보는 게 일이 됐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다 보니 ‘당산역 미녀(米女)’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천 역장은 “어제 인근 어린이집에서 5~6세쯤 되는 아이들이 와서 쌀을 부었다. 또 얼마 전에는 청소년적십자(RCY) 소속 중학생들이 쌀을 모아서 가져왔다. 아무 말 없이 쌀을 붓고 가는 경우도 있다. 혼자서 12킬로그램을 부은 사람도 있었다”고 감사해했다.
간혹 먹기 힘든 묵은쌀이나 벌레 난 쌀을 버리는 대신 쌀독에 붓는 경우도 있다. 천 역장은 “그런 쌀은 골라낸다. 그런 쌀을 나눠드리면 받는 분들이 마음 상한다. 연로하신 분들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당산역 ‘사랑의 쌀독’이라고 해서 인근 지역에서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1호선 외대앞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는 손재영(69·동대문구 이문동) 할아버지는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왔다”고 했다. 지체장애 2급인 손 할아버지는 신체 오른쪽이 마비돼 한쪽 팔과 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지만, 지팡이를 짚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천 역장은 “경기도 의정부, 부천에서 오는 분들도 있다. 연세드신 분들은 돈 내지 않고도 지하철을 탈 수 있으니 먼 곳에서도 이곳을 찾는다. 소일 삼아 오시기도 한다”며 “2킬로그램은 이분들 딱 한 주일치 식량인데, 2주일에 한 번씩 드리게 되어 죄송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남을 돕는 선행에 상복도 뒤따랐다. 천 역장은 지난해 4월 30일 근로자의 날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사랑의 쌀독’ 운영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이행했다는 공로였다. 화장실 환경을 개선해 고객 만족도를 높인 점도 인정됐다.
천 역장은 “어려운 분들을 돕는다는 보람이 있다. 어르신들에게 쌀 한 봉지씩 나눠드리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며 “가장 큰 상은 스스로 느끼는 보람”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쌀독’ 운영 시각은 서울지하철의 5개 역에서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그러나 지하철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 방문해주기를 권장하고 있다.
지원 자격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장애등급 3급 이상, 자녀가 없거나 집이 없는 사람들 중 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자격 기준이 까다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천 역장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되도록 많이 돕겠다는 생각”이라며 아직도 마음에 남겨두고 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한번은 60대 중반 여성이 찾아왔어요. 아들은 사업이 어려워 용돈을 못 주고, 자신은 일할 형편은 안 되는데,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었죠. 가끔 밥을 굶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때 자격기준에 해당이 안 된다고 그냥 돌려보낸 것이 후회돼요. 화곡동 어디쯤 산다고 하셨어요. 꼭 다시 연락을 주시면 좋겠어요.”
글·남창희 객원기자 / 사진·지미연 기자
서울지하철 2호선 당산역 고객상담실 ☎ 02-6119-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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