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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 소비자, 분해자. 중고교 생물 교과서를 보면 생태계의 순환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광합성을 통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포도당을 만드는 식물이 생산자이고 이를 먹고 사는 동물이 소비자, 식물이나 동물의 사체를 썩게 하는, 즉 분해하는 미생물이 분해자이다. 사실 인류는 미생물의 이런 탁월한 분해력을 톡톡히 이용해 왔다. 인류 최고의 기호식품인 술은 효모가 당분을 분해할 때 나온 부산물인 에탄올 덕분에 탄생했다.

생각해 보면 크기가 불과 1마이크로미터, 즉 100만분의 1미터 내외인 세포 하나가 전부인 미생물은 분해가 전문이지 좀 더 크고 복잡한 구조물은 만들지 않는 게 당연한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천연자석으로도 불리는 자철광의 상당 부분은 미생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산화 제2철을 환원시켜 만든 광물이다.

미생물은 왜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광물을 만드는 걸까?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은 아직 나와 있지 않지만 이런 과정이 결국 미생물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주위에 특정 금속이온의 농도가 높아지면 독성이 커져 미생물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속이온을 적당한 이온과 결합시켜 고체인 광물을 만드는 게 안전대책인 셈이다.

미생물이 광물을 만드는 메커니즘은 아직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않다. 연구자들은 박테리아 세포 표면의 실 같은 고분자에 산화철 입자가 달라붙는 현상을 관찰했다. 즉 고분자 실이 산화철 광물의 틀이 되는 셈이다.


20~100나노미터 굵기 반도체튜브 생산
그런데 최근 미생물이 단순히 광물을 만드는 걸 넘어 튜브형태의 반도체 또는 금속성 물질을 만든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다. 특히 정부의 관심도 매우 크다.  발견의 주인공은 광주과학기술원 환경공학과 허호길 교수, 이지훈 박사팀. 허 교수팀은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일대의 퇴적층에서 찾아낸 슈와넬라균이 머리카락 굵기의 1000분의 1 정도인 20∼100나노미터 굵기의 반도체 나노튜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다.

1991년 일본 NEC사의 연구원이었던 이지마 스미오 박사가 발견한 탄소나노튜브는 그 잠재력이 인정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금속처럼 전기가 잘 통하고 쇠보다 100배나 더 강하면서도 15도까지 휘어질 정도로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합성을 통해 나노튜브를 만드는 방법은 비용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따라서 경제성이 있으면서 품질이 우수한 나노튜브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생명체가 나노튜브를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 교수와 이 박사는 원래 금속을 환원시키는 박테리아인 슈와넬라균을 이용해 토양의 비소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슈와넬라균의 분비물이 가는 노란색 관(管) 형태로 성장하는 현상을 발견한 것. 산소를 싫어하는 슈와넬라균이 황, 비소와 만나면 황화비소라는 물질이 생기는데, 이 성분은 시간이 갈수록 관으로 성장하면서 길이가 30마이크로미터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슈와넬라균은 왜 황화비소를 만들까.

예로부터 독약으로 쓰인 비소는 맹독성 물질이다. 황 역시 이산화황의 형태가 되면 생명체에 위협이 된다. 따라서 이런 물질들의 농도가 높아지면 어떤 식으로든지 대처해야 하는데 슈와넬라균은 서로를 결합시켜 고체인 광물로 만들어버리는 비책을 마련한 셈이다. 아무튼 이렇게 만들어진 초소형 관, 즉 나노튜브는 비소와 황이 대략 2 대 3의 비율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이 비율을 보이는 광물이 바로 ‘웅황(雄黃)’이다. 웅황은 동의보감에도 등장하는 약재로 살균작용이 강해 종기나 상처에 가루를 내 뿌렸다고 한다. 그러나 독성이 있어 임산부나 허약한 사람에게는 쓰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차세대 나노 광전자 소자 재료로
최근까지 웅황은 지질학적인 과정을 통해 생성된다고 생각했는데 미생물도 웅황과 조성이 비슷한 광물을 만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슈와넬라균은 어떻게 황화비소를 나노튜브 형태로 만드는 것일까. 이 부분 역시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미생물이 세포벽 밖에 섬유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이를 틀로 삼아 나노튜브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진다.

흥미로운 점은 비소나 황 둘 가운데 하나만 있으면 슈와넬라균이 제대로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 이들이 함께 있어야 서로 묶어 처리할 수 있다. 한편 관이 자라면서 비소의 비율이 점차 높아진다. 따라서 비소와 황이 2 대 3일 때는 웅황 같은 광물이 형성되지만 1 대 1이 되면 ‘계관석’이 만들어진다. 비소의 비율이 더 높아지면 비소끼리 만나면서 금속 같은 특징을 띤다.

따라서 슈와넬라는 반도체 또는 금속과 유사한 전기적 성질을 띠는 나노튜브를 만들어내는 미니 공장인 셈이다. 한편 황화비소 나노튜브는 빛에 민감하게 반응해 자외선을 쪼이면 전류가 더 많이 흐른다. 따라서 빛을 인식하는 센서로도 쓰일 가능성이 있다.

허 교수는 “생물체가 만든 황화비소 나노튜브는 차세대 나노크기 광(光)전자 소자를 만드는 데 재료로 쓸모가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슈와넬라에 대한 연구를 더 해 일정한 크기와 조성을 지닌 나노튜브를 만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유력 학술지인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지난 12월 18일자에 실렸다.

컴퓨터에서 태양전지까지 전자 소자는 현대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전자 소자를 만드는 과정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 뿐 아니라 독성 금속과 화합물이 남는다. 따라서 최근 전자공학 업계는 좀 더 환경 친화적인 방법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깜깜한 흙 속에 파묻혀 조용히 살아가던 미생물이 지구를 지키는 데 한몫할 날도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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