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3,original,center[/SET_IMAGE] “음악을 통해 평화와 반전 메시지를 세상에 전한 의미 있는 연주회였습니다.” 대관령음악제 음악감독을 맡은 강효(60) 씨. 지난 8월3일 강원도 철원군 옛 노동당사 앞에서 ‘비무장지대(DMZ) 평화·생명 콘서트’를 마치고 강 감독은 “음악을 통해 모두 한마음이 되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나 폭우로 인해 합창단 100여 명이 준비한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을 무대에 올리지 못한 것을 음악감독답게 못내 아쉬워했다. 세계적 실내악 앙상블 ‘세종 솔로이스츠’의 음악감독이자 세계적 명문인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 교수인 그가 1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8월3일부터 15일까지 강원도 대관령과 용평 일대에서 열린 제2회 대관령국제음악제 음악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대관령국제음악제 음악감독을 맡아 행사 일체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여섯 살 때 피란지였던 대구에서 처음으로 음악의 세계를 접했다는 강 교수. 그가 처음 배운 악기는 피아노였다. 그러나 열 살 무렵 아버지가 사서 들고 온 바이올린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바이올린에 일생을 걸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서울대 음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4년. 마침 내한공연을 위해 한국에 들른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벌 시노프스키가 우연히 강 교수의 연주를 듣고 매료돼 자신이 받은 출연료를 강 교수에게 주며 “이 돈으로 미국에 오라”고 적극 권했던 것이다. 시노프스키와의 인연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그는 그 길로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해 고(故) 도로시 딜레이 교수를 사사하며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B]‘강효의 힘’이 대관령국제음악제 성공 이끌어[/B] 졸업 후 교육자의 길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도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딜레이 교수를 도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부터였다. 그는 1985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줄리아드의 정교수로 임명됐다. 지금까지도 줄리아드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다. 지난 20년간 강 교수의 손을 거쳐간 제자는 족히 수백 명을 헤아린다. 그중에서도 길 샤함·장영주·김지연 등이 먼저 손에 꼽힌다. 딜레이 교수는 생전에 강 교수를 가리켜 “음악의 기초와 음악성을 동시에 완벽하게 가르치는 명교수”라고 평했다. 강 교수를 소개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95년 자신의 주도로 창단한 실내악단 세종 솔로이스츠다. 줄리아드 출신의 한국인 연주자를 중심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인 현악 연주자 14명으로 구성됐다. 물론 세종은 ‘세종대왕’을 뜻한다. 창단 2년 만인 1997년 미국의 대표적 음악축제 중 하나인 아스펜음악제 상임 연주단체로 초청됐고, 1998년에는 굴지의 매니지먼트사인 ICM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또한 2000년부터는 미국 공영방송인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PR)의 상주 연주단체로도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세종’이 주목받는 것은 한국계 작곡가 얼 킴(Earl Kim)의 곡을 초연하는 등 우리 음악을 세계 무대에 알리는 민간 문화외교 사절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모국을 위한 일을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바쁜 일정임에도 대관령국제음악제 음악감독직을 흔쾌히 수락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사실 막 걸음마를 뗀 단계인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짧은 기간에 국제 음악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는 강효 교수의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가 주효했다. ‘강효의 힘’이 없었다면 블라디미르 펄츠만·조엘 스미어노프 등 세계적 명연주자를 대관령 산골짜기까지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인이 주목할 만한 음악제를 국내에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관령국제음악제를 통해 세계 음악인들이 강원도에 모이고, 또 그럼으로써 평창과 강원도가 세계에 알려졌으면 합니다.” [SET_IMAGE]4,original,center[/SET_IMAGE] “많은 분이 오셨는데 관중석에서 치는 박수소리가 무대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리네요. 더 크게 쳐주셔도 우리는 상관없어요.” 지난 8월9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대관령음악제 인 서울’ 2막 무대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35)의 당돌한 요구다. 정경화와 장영주의 세대차를 메우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김지연. 국내에는 유명 샴푸 광고 모델에 출연한 덕분에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바이올린을 켜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러나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그는 미모보다 뛰어난 음악성으로 더 인정받고 있다. 한국과 미국·유럽·일본 등을 오가며 바쁜 연주생활을 즐기고 있는 그 역시 대관령국제음악제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대관령국제음악제를 찾은 것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바쁜 일정 중에도 매년 대관령국제음악제를 찾는 것은 이 음악제의 음악감독을 맡은 강효 교수와의 뗄 수 없는 인연 때문이다. 그는 강 교수가 아끼는 수제자 중에서도 첫 손꼽힌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제가 열세 살 때였어요. 강 선생님께서 고(故) 도로시 딜레이 선생님 밑에서 조교수로 계실 때였죠.”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코리아타임스>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그는 선화예중 1학년 때인 열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영어도 안 되고 외로웠죠. 그런데 강 교수님과의 첫 레슨 후 처음으로 미국에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과 뜻이 통한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1985년 뉴욕 현악 오케스트라와의 카네기홀 협연, 1989년 영 콘서트 아티스트 1위 입상, 1990년 미국 최고의 영예를 자랑하는 애브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 수상, 1994년 프랑스 미뎀 국제음반박람회 ‘올해 최고의 데뷔 음반상’ 수상 등 그는 지금까지 슬럼프 한 번 없이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는 “노력도 많이 했지만 행운도 많이 따랐다”고 말한다. [B]인간적 매력과 패션 감각까지 톡톡 튀는 연주가[/B] 그런 말을 할 만한 것이, 그는 1989년 영 콘서트 아티스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영광과 함께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선 아들러 카젠더 할머니를 만났던 것이다. <뉴욕타임스> 사장의 가족으로 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카젠더는 피아노를 좋아하고 바이올린 소리는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나 영 콘서트에서 김지연의 연주를 듣고 바이올린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이후 카젠더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김지연을 돕고 있다. 김지연의 두 번째 행운은 서인도제도에 있는 카젠더의 버진군도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1992년 찾아왔다. 이웃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영국 <선데이타임스> 주필 앤드루 닐이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게 된 것이다.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 줄 알았던 앤드루 닐은 후에 김지연의 연주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영국 데뷔 공연을 주선했고, 김지연을 <선데이타임스> 표지에까지 등장시켰다. 물론 그의 영국 데뷔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기교와 매혹적 선율을 자랑하는 그는 그 후 뉴욕 필·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새 세대의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8년 전 뉴욕의 한 카페에서 만난 남편과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6개월 만에 결혼했다는 김씨. 그는 지난 6월 말 정형외과 의사인 남편을 따라 정든 뉴욕을 떠나 휴스턴으로 이사했다. “지난해만 해도 365일 중 250일을 연주활동을 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어요. 신랑한테 많이 미안하죠. 그래도 제 생활을 잘 이해해줘 고맙죠.” 그는 “오는 11월쯤 미국과 일본에서 새 음반을 출시할 계획”이라며 “한국에서도 12월이면 새 앨범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SET_IMAGE]5,original,center[/SET_IMAGE] 김영호(49) 교수는 유쾌하다. 유쾌한 그의 연주는 더 유쾌하다. 누구보다 ‘즐기는 음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저는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해서나 유명해지고 싶어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없어요. 피아노가 정말 좋아 연주하는 것이죠. 제 인생의 중심에는 언제나 음악이 있었으니까요.” 국내 피아노계를 지키는 거목 김영호. 그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학력도 화려하다. 미국에서 컬럼비아 예비학교를 거쳐 줄리아드 음대와 대학원을 마친 뒤 맨해튼 음대에서 에바 반 겔더 장학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귀국 후 그는 경원대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 기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과 블로흐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초연하는 등 독주가로서 국내 피아노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한몫하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김 교수는 활발한 연주활동 못지않게 해외 음악제에 가장 많이 초대받는 국내 연주가로 유명하다. 그가 참가하는 해외 음악제는 적게 잡아도 1년에 3~4개는 넘는다. 특히 스페인 국제 피아노 페스티벌에는 지난 5년간 연속 초대돼 협연 및 독주, 실내악을 연주했다. 2004년부터는 ‘스페인 아로나 뮤직 페스티벌’ 음악감독도 맡고 있다. 그는 해외 음악제 참가를 즐기는 이유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짧게는 1~2주, 길게는 한 달씩 열리는 음악제에서는 마음 맞는 동료 연주가들과 집중적으로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1년에도 수차례 음악제를 찾게 하는 매력이죠.” 마음 맞는 동료 음악가가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협연한다는 김 교수. 그는 지난해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만난 스미노프가 협연을 요청하자 주저 없이 허락했다고 한다. [B]‘서울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창단, 실내악 전파[/B] “우리나라 연주자들은 으레 오케스트라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학생들은 독주자가 돼 유명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죠. 그러나 외국에서는 유명한 연주가일수록 실내악을 잘합니다. 실내악은 아무리 유명한 연주가라고 해도 동료 간의 신뢰관계가 없으면 불가능하거든요.” 그는 실내악 공연을 위해 서울 동부이촌동 아파트를 아예 연주 스튜디오로 뜯어고쳤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 플루트를 전공한 부인과 함께 연주하고 식사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국내 실내악의 활성화를 위해 1999년 ‘서울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를 창단해 1년에 2회씩 연주회를 열고 있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하는 연주자가 많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려고 평생 노력하는 것이죠.” 자신의 이름 석 자보다 음악을 먼저 앞세우는 연주자로 남고 싶다는 김영호. 그는 오는 9월 마산과 대전에서 연주회를 가진 후 10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피아노컨벤션에 참석할 예정이다. [SET_IMAGE]6,original,center[/SET_IMAGE] “지난해 대관령을 찾은 음악인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더라고요. 너무 훌륭했다고요. 그래서 올해는 원래 다른 음악제에 참석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취소하고 서울에서 내려왔죠.” 제2회 대관령국제음악제 마스터 클래스 교수로 참석한 첼리스트 백청심(57) 서울대 음대 교수. 그는 “세계적 연주자들과의 만남으로 타성에 젖어 잊고 있던 기본기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기회가 됐다”며 “학생들을 가르치러 왔지만 내 스스로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이라고 대관령국제음악제 참석 소감을 밝혔다. 유럽 유학은 커녕 국외 유학도 쉽지 않았던 시절 그는 서울대 음대 졸업 후 벨기에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벨기에왕립음악원에 진학했다. “요즘은 유럽에도 한국 유학생이 넘쳐나지만 제가 입학했던 1971년만 해도 한국 유학생은 아마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 동네에 환영 플래카드가 걸리고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마중 나오셨죠.” 벨기에왕립음악원 졸업 후 백 교수는 첼로의 거장 앙드레 나바라를 사사하기 위해 독일 데트몰트 음대에 진학했다. “데트몰트 음대 졸업 후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 진학했는데, 마침 그 학교에 앙드레 나바라 선생님이 겸임교수로 오시게 됐어요. 그래서 운 좋게도 앙드레 나바라 선생님 밑에서 6년이나 사사할 수 있었죠.” 백 교수는 유럽 체류 중 벨기에왕립교향악단(ONB) 단원과 뮤지카 노베 현악사중주 단원으로 활동하며 유럽 각지를 순회 연주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라이문트극장 교향악단에서 첼로 수석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81년 귀국 후에는 서울·인천·대전시향 및 바로크합주단을 비롯한 여러 국내 실내악단과 협연했다. 이밖에도 빈 콘첼트 하우스 협연, 프라하 독주회 등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꾸준한 연주활동을 하는 한편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박경옥·노인경·김지훈·전소영·정선이·김선영·정재윤·서상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연주활동에 치중하다 보면 가르치는 데 소홀하게 되고, 또 가르치는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연주활동에 소홀해지기 쉽거든요. 항상 이 두 작업을 고르게 하려고 노력하죠.” 유학까지 다녀온 제자들에게 귀국 후 재능과 열정을 쏟아부을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는 백 교수. 그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자유로운 연주활동의 장을 열어주기 위해 조만간 첼로 앙상블을 창단할 계획이다. “음악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훌륭한 연주자들이 계속 배출되는데, 연주자들이 원하는 안정된 직장은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수많은 연주자가 학교에 자리가 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죠. 지난 수년 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고민했어요. 연주자 스스로 앙상블 팀을 꾸려 연주활동을 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저부터 솔선수범해 제자들과 함께 앙상블 팀을 꾸리려는데, 사실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적 첼로 앙상블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백 교수. 그의 다부진 말에서 프로 연주가의 자부심과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