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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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제주도 야산에서 여인의 사체 한 구가 발견됐다. 경찰은 사체의 옷에서 미세한 혈흔을 찾아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 분석을 의뢰했지만 감정 결과와 일치하는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자칫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사건은 2005년 12월 의외의 곳에서 해결됐다. 평택에서 성폭행 혐의로 붙들린 윤모씨의 유전자(DNA)가 ‘제주 사건’ 혈흔으로 분석한 유전자와 일치한 것이다. 결국 용의자 윤모씨는 제주에서 일하던 중 저지른 범행을 실토했다. ‘완전범죄는 없다’는 사실을 국과수가 또다시 입증한 셈이다.
최근 TV 외화시리즈 ‘CSI 과학수사대 ’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피해자의 셔츠에 묻은 립스틱 자국만으로도 범인을 잡아내는 등 과학적인 기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요람이라고 말하는 국과수는 어떨까. 애석하게도 국과수 직원들에게는 ‘수사권’이 없다. 수사권이 없어 힘든 점은 없는지 또는 일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범인이 누구라고 지목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장에서 채취한 증거자료와 유전자 분석결과가 일치하는 용의자가 있는지를 알려줄 뿐입니다. 범인을 잡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죠.”
국과수 유전자분석과 한면수(47·생물공학박사) 과장의 첫 마디는 명쾌했다. 범인의 자백보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는 것이 국과수에서 하는 일이다.
[B]35명으로 구성된 ‘한국판 CSI’ [/B]
생물과학이나 생명공학을 전공한 35명의 석·박사들로 이뤄진 국과수 유전자분석과는 강력사건의 감정물을 대상으로 유전자 감식을 통해 범인을 추정하거나 피의자가 있는 경우 범행을 입증하는 일을 맡는다. 유전자 감식은 시료를 채취해 유전자를 분리하고 적은 양의 DNA를 증폭, 유전자형을 판독하는 일이다.
전국 230여 개 경찰서에서 들어오는 사건별로 감정물의 유전자를 분석해 동일인에 의한 연쇄범죄인지를 밝히기도 한다. 범인의 유전자 분석결과가 같으면 연쇄범죄임을 각 경찰서에 알려 ‘범행 지도’를 만들어준다. 이를 통해 수사의 지역적 공조가 자연스레 이뤄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과수가 해결한 사건은 올해 1월 전국을 무대로 10여 년간 부녀자를 성폭행해온 일명 ‘발바리’ 사건을 비롯해 1년 동안 24차례 연쇄 성폭행을 저지른 30대 검거(2월), 부산북부 살인사건(3월)과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4월), 인천 아동 성폭행범 검거(4월)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국과수 유전자분석과에서 하는 업무 중 범죄자들의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일도 있습니다. 이미 지난해 7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법률안이 통과됐어요. 시민단체 등에서 인권보호 등의 이유로 반대하지만 이미 세계 76개국에서 실시 중입니다. 범죄자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재범률을 낮추는 일로 이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지난 여름, 유전자분석과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다. 7월말 프랑스인 집단거주지인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에서 2구의 영아 사체가 발견됐다. 휴가를 다녀온 집주인 쿠르조 씨 부부가 냉장고에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 수사의 실마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부부는 프랑스로 출국했다. 경찰은 국과수에 유전자 분석을 의뢰했고 뜻밖에 쿠르조 씨 부부가 죽은 아기의 부모로 밝혀졌다. 당시 그들은 “한국의 수사력을 믿지 못해 프랑스에서 조사받겠다”는 회견을 했다.
우리나라와 프랑스에서 논란이 계속되자 프랑스 방송사가 취재를 위해 국과수를 방문했다. 결론은 우리나라의 유전자 분석에 관한 기술력을 신뢰한다는 것. 이에 대한 한 과장의 반응은 담담했다.
“유전자 분석 장비와 조사방법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검사 결과는 장소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서래마을 사건은 수차례의 교차 검증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에 유전자 분석이 맞을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깝습니다.”
확률 100%는 과학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에 그만큼 그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쿠르조 씨의 타액과 산부인과에서 찾아낸 부인의 수술적출물, 집에서 채취한 머리카락 등을 통한 유전자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B]“길거리 담배꽁초 주인도 찾아냅니다”[/B]
우리나라에 DNA 분석 업무가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건 1990년대 초. 하지만 기술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참사 때 세계 여러 나라와 기술력을 겨룰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분석력이 최고 점수를 받은 것. 한 과장은 “길거리의 담배꽁초 10개를 수거해 감식하면 8~9개는 주인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보존 상태에 따라 한두 개는 감식이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력에 비해 취약한 부분은 인력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전자 감정 인력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모자라는 실정이다. 인구 150만 명 중 1명꼴로 19만 명당 1명인 미국, 8만6000명당 1명인 영국, 63만7000명당 1명인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검찰청 4명을 포함해 고작 39명의 인력뿐이다. 지난해는 모두 3만2000건을 처리했는데 1인당 처리 건수가 800건을 훌쩍 넘어 ‘업무를 밀어내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대구 지하철 참사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 큰 사건이 생기면 통상 업무가 정지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하는 것이 다반사다. 한 과장은 힘든 일을 잊을 수 있는 건 사건 해결에 보탬이 됐을 때라고 말한다.
“유전자 분석으로 범인을 잡았거나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을 때 보람이 큽니다. 업무 특성상 직접 인사를 받기는 어렵지만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줬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국과수 유전자분석과가 있는 한 1980년대에 발생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범인이 잡히지 않는 강력사건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국과수에서는 대국민 서비스 차원에서 미아찾기운동도 벌이고 있다. 경찰청 실종아동찾기센터나 여성청소년계를 통해 국과수가 보관 중인 1만2000여 보호아동의 유전자 정보를 통해 미아를 찾을 수 있다.
[RIGHT]이병헌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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