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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최수병(崔洙秉) 물가정책국장의 이름이 물가 수(洙)에 잡을 병(秉)입니다. 그러니 물가가 안 잡히겠습니까.”
1983년 초 대통령에게 업무를 보고하던 김준성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이런 농담을 곁들였다. 당시 물가를 보면 부총리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농담 섞인 자랑을 할 만했다.
80년대 초만 해도 한국 경제에서는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이 당연한 현상으로 여겨졌다. 소비자물가는 1980년에 28.7% 급등했다. 정부가 공공요금을 누르는 등 강압적 정책을 동원한 1981년에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1.4%를 기록했다. 이와 비교하면 정부가 1982년에, 경제부처 내부에서도 그저 목표로만 여겼던 ‘한 자릿수’인 7.2%로 물가상승률을 뚝 떨어뜨린 것은 분명 큰 성과였다.
이후 한국 경제는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 물가상승률은 줄곧 한 자릿수 아래에 머물렀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플레이션은 더 이상 기승을 부리지 못했다. 간혹 통화·재정정책을 방만하게 운용한 몇몇 먼 나라가 인플레이션에 짓눌려 힘겨워한다는 소식이 들릴 뿐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중국이 전 세계에 값싼 상품을 무제한으로 공급하면서 ‘물가 걱정은 이제 끝’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인플레이션 시대가 다시 도래하는 것인가. 최근 1년 동안 중국을 비롯해 인도,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국가의 물가는 8~10% 상승했다. 러시아에선 물가가 14% 올랐고, 아르헨티나는 23%, 베네수엘라는 29% 급등했다. 우리나라에선 5월 소비자물가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4.9% 상승했다. 5월 상승률은 2001년 6월 이후 약 7년 중 최고치다.
전 세계적인 물가상승의 원인은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오른 것이다. 물가안정의 ‘공신’으로 칭송받았던 중국이 이번엔 물가상승의 ‘원흉’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빠른 경제성장은 중국 내부에서 물가상승의 압력을 낳았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신흥 경제국의 성장은 원자재 수요 증가와 가격 상승을 일으킨 뒤 물가상승 물결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인플레는 부동산투기 등 부작용 낳아
인플레이션이 왜 문제가 되나. 국내 한 언론매체는 “물가가 급등하면 당장 내수가 위축되고 이는 기업의 수익성 악화와 성장률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비용 요인으로 인한 물가상승은 분명 경기를 누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물가상승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면, 즉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다른 차원의 폐해가 발생한다.
다른 차원의 폐해란 화폐의 구매력이 떨어지는 데에서 비롯된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1년 전과 같은 급여를 받는다면 실질적으로는 급여가 감소한 셈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 대신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이왕이면 물가상승률보다 더 높은 폭으로 값이 오르는 자산을 갖고 있으려 한다. 사람들은 현금성 자산을 줄이고 금과 부동산 같은 자산을 늘리고자 한다. 현금성 자산의 가치가 시일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출도 오래되면 원금 상환 부담이 큰 폭 경감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큰돈을 빌려서라도 경쟁적으로 실물자산을 사들인다. 실제로 인플레이션은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부동산투기라는 큰 부작용을 낳았다.
물가가 빠른 속도로 오르면 화폐의 기능 가운데 ‘가치 저장’은 물론 ‘교환’까지 마비된다. 초(超)인플레이션이라고 불리는 빠른 인플레이션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경험했다. ‘설마 이랬으랴’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당시 모습을 옮겨본다.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갚느라 재정적자에 허덕였고, 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중앙은행은 화폐를 더 찍었다. 그 결과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1922년에는 아찔한 속도로 가속된다. 1914년에서 1919년 사이에 두 배로 뛴 물가는 1922년에는 불과 다섯 달 만에 두 배가 됐다. 마르크 가치는 1923년에 1달러당 1조 마르크로 폭락한다. 1914년엔 1달러당 4마르크였으니, 9년 동안 인플레이션이 무려 2500억 배 이뤄진 것이다.
당시 독일 직장에서는 매일 급여를 지급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월급이나 주급의 가치는 며칠만 지나면 거의 다 날아가버리기 때문이었다. 임금소득자들은 ‘일급’ 돈다발을 받아들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세면대의 물처럼 금세 가치가 바닥나는 돈을 버리고 현물을 갖기 위해서였다. 의사들은 진료비로 현금 대신 버터나 달걀을 청구했다.
기대심리 자리잡으면 악순환
화폐는 신뢰를 바탕으로 유통된다. 초인플레이션은 물론이거니와 인플레이션은 이 신뢰를 무너뜨린다. 신뢰가 무너지면 일하고, 고용하고, 빌리고 빌려주는 등 화폐를 매개로 한 모든 경제행위가 ‘손해를 덜 보기 위한 게임’ 양상으로 전개된다. 노조에서는 인플레이션을 뛰어넘을 정도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사업자도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제품과 서비스 값을 올린다. 돈을 빌려주는 쪽에서도 이자율에 물가상승률을 더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경제주체들 사이에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자리를 잡는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인플레이션을 장기화한다. 경제주체들의 관심은 점점 손해를 덜 보면서 ‘손 안 대고 돈 버는’ 쪽으로 향한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 투자에 열을 올리게 된다.
경기가 좋지 않은 가운데 외부적인 비용 요인이 물가를 밀어올린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대응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원래 물가를 잡으려면 경기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하는 법이다. 원유와 같이 수입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한 물가상승에는 금리 외에 다른 정책수단이 있다. 환율이다. 환율을 낮춰 원화 가치를 높이면 수입 물가를 끌어내리는 효과가 있다.
마침 정부는 경제정책의 중심을 ‘성장 위주’에서 ‘물가 안정’으로 옮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긴축적인 기조로 정책을 펴 나가되, 물가상승에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받는 취약계층은 따로 지원을 펴는 정책조합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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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