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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추락하던 한국 경제가 붙든 국제통화기금(IMF). 그러나 IMF도 한국을 외환위기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1997년 11월 21일 IMF에 도움을 요청하고 협상을 거쳐 구제금융 협정을 타결한 것은 12월 3일. 첫 자금 55억 달러가 12월 5일 지원되는 등 12월 한 달 간 161억2000만 달러가 들어왔지만 이 가운데 단기외채 상환으로 120억7000만 달러가 다시 빠져나갔다. 한국에 돈을 빌려준 외국 금융회사들이 만기연장 대신 IMF 지원 자금을 빼먹은 꼴이었다.

해외 금융회사들이 97년 12월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대한 채권을 계속 회수한다면 IMF 지원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판이었다. 따라서 한국은 여전히 부도 위기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로소 숨을 돌리게 된 것은 정부가 98년 1월 말 해외 13개 채권 금융회사와 단기외채 만기연장에 합의하면서부터였다.

한국의 외화 부족을 해소해주지 못한 채 IMF는 우리에게 고강도 처방을 강요했다. 고금리와 긴축재정, 그리고 퇴출 위주의 금융, 기업구조조정이었다. ‘한국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기 외화 유동성 부족에 처해 있다’던 이전 입장에서 표변한 것이었다. 캉드시 총재는 IMF 자금지원 조건을 ‘위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며 권했다. 고통스럽더라도 그 과정을 제대로 밟아나가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너무도 혹심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실로 닥치기 직전까지도 IMF 구제금융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이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여러 경로를 통해 IMF 구제금융에 대해 보고받은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감’이 없었다. 강경식 전 부총리가 11월 14일 “IMF와의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보고했는데도 김 전 대통령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강 전 부총리는 “너무나 담담하게 승낙하는 것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문민정부의 경제가 ‘구제금융으로 마감’이라고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자존심 상하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대통령께서는 그런 일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강경식의 환란일기> 중)


IMF 보고받은 YS 너무도 담담
IMF가 얼마나 가혹한 조건을 지우는지 아는 이들은 ‘IMF 행’을 반대했다. IMF 구제금융 이외의 대안은 없었을까. 사실 당시 경제관료들은 IMF로 가기 전 일본에 도와줄 의향이 있는지 타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자금난 해소를 위한 지원은 IMF를 통해서만 하도록 이미 미국과 합의했다”며 난색을 표했다. 또 IMF 대신 해외 금융회사에서 지원 금융을 받는 방안이 거론됐다. 그러나 IMF 체제에 놓인 한국의 구조조정 시장에서 고수익을 낼 기회를 마다하고 한국을 도와줄 금융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IMF의 대주주인 미국이 한국을 ‘구제금융의 덫’으로 몰아넣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한국 경제는,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운명이 예고된 주인공처럼, 제발로 한발 한발 IMF로 다가가고 있었다. 태국 외환위기와 홍콩 증시 폭락이라는 외부 충격이 가세했어도, 내부 요인은 온전히 우리 탓이었다.

만약 금융개혁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으면 어땠을까. 당시 정부 경제팀에서 기대한 대로 한국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보임으로써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까. 기아자동차를 100일간이나 끌지 않고 조기에 법정관리 절차로 넣었다면 국제금융시장의 한국에 대한 신뢰가 다소나마 회복되었을까.

부질없는 가정들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런 가정들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97년 한국에 부족한 것은 외환뿐이 아니었다. 리더십도 결여돼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머리는 빌리면 된다’고 호언한 것처럼 복잡한 경제 현안을 아래에 맡겨두는 스타일이었다. 미리 모범답안을 정해 보고하는 경제수석이 대통령에게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정권 말 레임덕 시기였다.


부족한 건 리더십이었다
기아자동차 김선홍 회장과 노조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을 끌어들여 구조조정을 회피했다. 여당의 이회창 후보도, 야당의 김대중 후보도 기아자동차를 독자 회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기아자동차 처리 지연은 국제금융시장의 한국에 대한 신뢰를 깎아내렸다. 한번 믿음을 잃은 한국 정부는 엉뚱한 일에서까지 오해를 받는다. 10월 22일 정부와 채권금융단이 기아자동차를 산업은행 출자전환과 함께 법정관리한다고 발표한다. 이를 해외에서는 공기업화로 잘못 받아들인다. 기업 구조조정을 시장원리에 따라 하지 않고 재정으로 해결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대통령이 팔짱을 끼고 있더라도 정치권과 행정부, 중앙은행, 언론, 기업가 등이 함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나. 그러나 선거를 앞둔 여당과 야당에게는 전체의 이익보다는 표가 우선이었다. 국회는 한국은행의 반대를 넘어서까지 금융개혁법을 처리하지 못했다.

설령 위의 각 과정에서 리더십이 발휘됐더라도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를 피해 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IMF 체제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금융·외환시장에 사상 초유의 충격이 가해졌을 것이다. 위의 과정이 전개되기 전 이미 외채가 급증한 뒤였고, 반면 외채상환 능력은 크게 저하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외채를 갚지 못하는 파산 지경에 이른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도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이 있다. 외부적으로는 국제자본의 한국과 동남아 쏠림 현상이 있었다. 90년대 중반 국제자본의 이 지역에 대한 전망은 장밋빛 일색이었다. 마침 김영삼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준비하며 외화차입 규제를 풀어놓았다. 기회를 놓칠세라 한국 금융회사와 대기업은 실력 이상으로 한껏 외화를 차입했다.

금융회사가 직접 운용한 외화자금도 부실해졌지만, 대기업이 빌린 외채가 더 문제였다. 대기업은 외채는 물론 국내 금융권 돈도 마구 끌어썼다. 턱없는 자신감에서였다. 무모한 자신감은 견제받지 않았다. 당시 우리 경제의 리더는 기업 총수들이었다.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이 정설로 통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기업은, 적어도 상당수 대기업의 2세 총수는 2류가 아니었다. 대기업들은 결국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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