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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지구에서 숲이 사라지고 있다. 숲이 사라진 곳에는 어김없이 개발의 삽질이 시작된다. 개발이 끝나면 사람들은 또 다른 숲을 노려본다. 지구의 허파라 일컫는 밀림지역이 여기저기서 잘려나가고 있다. 아무 두려움 없이 나무를 자르고 숲을 뭉개고 땅을 들쑤시는 무엄한 시대이다. 자연과의 불화는 환경재앙을 불러왔다. 바로 전 지구적 근심거리요 핵무기 보다 무섭다는 온난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산들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라고 한다. 몰려드는 등산객으로 그 어디를 가도 신령스런 숲의 기운은 찾아 볼 수 없다. 입장료를 받지 않자 국립공원은 흡사 야유회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노래하고 떠들고 술 마시고 싸우고 춤추고 먹느라 정신이 없다. 등산객 1000만명 시대, 우리의 산과 숲을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산 울음과 숲의 비명을 외면할 것인가.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산마다 무수한 샛길이 났다. 산길은 결국 산의 주름이니, 무수한 주름이 깊게 패면 산은 무너질 것이다.  

 문명은 숲에서 탄생했지만 숲의 학대는 그 문명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래서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고 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숲에서 태어났다. 인도 인더스, 갠지스강의 유역이나 중국 황하 유역에서 발현된 초기 문명도 숲에서 피어났다. 울창한 산림을 이용하여 문명의 꽃을 피워올렸지만 이들 지역은 대신 숲을 파괴하면서 결국 종말을 맞았다. 숲이 사라지자 생태계가 파괴되고 기후가 변했다. 환경재앙이 이어지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숲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 이것은 물음인 동시에 대답이다. 숲이 사라진 곳에는 미움과 증오가 자라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떤가. 지금 우리는 문명의 힘을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온갖 생명붙이의 삶터 위에 문명이란 거대한 탑을 쌓아올렸다. 그럴수록 숲은 줄어들었다. 우리 곁에 있었던 숱한 종(種)이 스러져 갔다. 지난 세기에 지구는 인간에 의해 인간만을 위해 돌았다. 약한 것들에게는 거대한 무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나무일 것이다. 세상을 푸르게 하고 순하디 순하다. 세상에서 인간에게 눈흘기는 나무는 보지 못했다. 저 홀로 크고, 베면 넘어진다. 오만가지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에는 모든 것이 있다. 흙, 돌, 물, 새, 벌레, 곤충, 짐승이 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분다. 해, 달, 별을 품고 하늘이 내려온다.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신성(神性)이 느껴진다. 아름드리 나무둥치는 하늘을 떠받치고 잎들의 퍼덕임은 요정의 노래 같다. 드문드문 초록 지붕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무더기는 신의 계시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뿌리는 저 깊은 땅 속으로 뻗어가 물을 퍼올리고 있을 것이다. 진화된 숲에는 인간이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있고 나름대로 질서가 있다. 지하, 지상, 천상의 세 세계를 가로지르는 나무는 저 깊숙한 과거의 심연으로부터 현재를 거쳐 영원으로 뻗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나무들. 거대한 유기체요, 에너지의 압축기인 숲. 온갖 잎과 열매로 생명붙이의 배를 채워줬다. 정녕 생명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숲은 어머니이고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숲은 야금야금 잘려나갔고, 인간의 톱질은 바로 인간의 심성을 잘라내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펴낸 책 '나무처럼 산처럼'에서 우리네 미련함을 통렬하게 꾸짖었다.

“까치가 곡식을 먹게 된 까닭이 있다. 농약을 마구 뿌려서 벌레들이 다 죽어 없어졌으니, 이제 까치가 먹을 거라고는 논밭의 곡식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농약을 뿌려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싹쓸이로 죽이는 데 아주 재미를 들였다.… 사람이 무슨 학문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떠벌리면서 거짓과 속임수로 살지 말고, 저 풀숲에서 우는 벌레만큼 고운 울림으로 자연 속에 어울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스스로 무덤을 파고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이 무섭고 소름끼친다. 이제 앞으로 내가 할 말은 다만 죽어가는 자연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가 부를 노래는 아직도 살아남은 내 모든 형제들에 대한 슬픈 찬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오덕은 죽어가는 자연을 증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승에서의 꿈은 그 옛날 하늘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고운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감하고 싶어했다. 그는 저승에서도 아마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 땅에 묻혔으니까. 우리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어디엔가 안길 수 없고, 어디엔가 내리지도 못하고 늘 떠다니는 도시인들. 이웃과 별빛, 달빛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현대인의 병은 숲속이 아니면 치유할 수 없다.

 숲에서는 근원을 살피게 된다. 영혼을 씻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성인과 현인들이 숲에 찾아들었고 지혜와 진리가 숲속에서 나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가식이 없고 억지스러움이 없다. 숲에는 미움이 없다. 분노가 없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그 속에서 음악이, 문학이, 철학이, 종교가, 그리고 사랑이 우러난다.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주공아파트단지 재건축공사를 하면서 단지 내에 심어진 모든 나무를 다시 옮겨심기로 했단다. 온통 아름들이 나무로 둘러쌓인 아파트단지는 흡사 숲 속의 마을 같았다. 그 나무 5만 그루를 모두 살려 옮겨심기로 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는 생명평화에 눈뜸이다. 25년이 넘는 나무들이 베임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도심의 `아파트 숲 살리기'가 거대한 생명평화운동으로 번지기를 기대해 본다.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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