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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이었다. 모래판의 황태자'라 불리던 천하장사가 이종격투기선수로 변신했다. ‘프라이드’ 종목에 처음 출전한 그는 수없이 얻어터졌다. 씨름은 원래 `때리는 운동이 아니기에 씨름선수가 글러브를 낀다는 것이 당치 않을 테지만 그는 링 위에 올라 피를 흘렸다. 갈수록 떨어지는 인기와 수입이 그를 모래판이 아닌 사각의 링에 오르게 했을 것이다. 그의 주먹질은 어설펐다. 샅바가 아닌 주먹 쥔 그의 모습이 슬퍼보였다. 우리 고유 민속경기인 씨름이 피를 흘린 것이다.
얼마 전 이종격투기 K-1을 봤다. ‘태권 파이터’라 불리는 한국선수가 일본 가라테 선수에게 패했다.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더니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가라테 선수는 주먹을 내두르며 포효했다. 흡사 가라테가 쓰러진 태권도를 조롱하는 듯했다.
이종격투기는 알다시피 권투, 레슬링, 킥복싱, 씨름, 유도, 삼보 등 서로 다른 무술을 습득한 고수들이 링 위에서 싸운다. 한마디로 싸움판이다. 철저히 흥행을 위해 고안된 경기는 이 시대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사람들의 욕구에 비례하여 경기는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속속 격투기 선수로 변신하고 있다. 가히 ‘피의 축제’이다.
이종격투기를 TV로 보고 있으면 이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재미있다. 화면은 피에 젖고, 보는 사람은 땀에 젖는다. TV로 봐도 저렇듯 사람을 흥분시키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아마도 피를 끓게 할 것이다. 이종격투기 특설 링은 ‘`현대판 콜로세움’에 다름 아니다. 로마시대 검투사들이 그랬듯이 이종격투기 선수들의 거친 호흡과 흐르는 피가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문명의 위용이 하늘을 찌르는데도 왜 현대인은 ‘원시적 폭력’에 취할까. 로마인들이 검투사들의 목숨 건 칼싸움을 즐겼듯이, 시공을 넘어 우리는 이종격투기 선수들의 싸움에 열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그 많은 세월에 무엇을 숙성시키고 무엇을 발효시켰는지, 로마인과 현대인은 무엇이 다른지…. 분명한 것은 폭력은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 곁에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내부에 폭력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무엇에 중독되었기에 이종격투기의 흐르는 피로 무료함을 씻을 정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폭력의 대리만족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사회에서 폭력은 모든 것에 스며 있다. 영화, 게임, 드라마는 이제 폭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장면들이 화면을 뛰쳐나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이종격투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혀 내 일이 아니듯이, 그들은 내 앞에서 벌어지는 `피의 축제'가 전혀 나와는 관련이 없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전쟁까지 생중계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감동보다 충격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정보전이 열을 뿜을수록 사회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점점 이웃이 멀어지고 있다. 혈연, 지연의 매듭이 헐거워지면서 현대인은 고립되어 가고 있다.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는 거대한 디지털의 우리 안에 갇혀 있다. 온기 없는 이성이 감성을 갉아먹기에, 야성이 그리워 저들은 `피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종격투기는 싸우는 기술의 세계화이다. 그러니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세계화라는 광풍(狂風)의 산물이다. 세계화는 열악, 열등한 것이면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우수, 우등한 것만 살아 남는다. 이종격투기는 지금 나라마다에 있는 고유의 무술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다. 그 무술 속에 들어있는 온갖 전설 등도 보잘 것이 없게 만들고 있다. 무림에 떠도는 고수들의 이야기는 이제 그 격이 현저하게 떨어져 버렸다. 이종격투기는 포효한다. ‘강한 자는 누구든 링 위로 올라오라.’
인류에게 원초적 궁금증이 있었다. “맨 손으로 싸운다면 세계에서 누가 최강자일까?” 흥행사들은 끊임없이 답을 만들었다. 그래서 ‘프라이드’라는 격투기가 만들어졌고, 마침내 ‘60억분의 1’의 사나이 효도르가 탄생했다.
나라마다 수백·수천 년 숙성시킨 무술이 있고, 이 무술에는 고유의 도(道)라는 것이 있는데 이종격투기는 이 도를 없애 버렸다. 승자의 환호와 패자의 신음만이 있을 뿐이다. 나라를 구한 태권도도, 도깨비를 쓰러뜨린 씨름도, 무림을 평정한 소림사 권법도 링 위에 올리면 모두 피를 흘린다. 고수들이 돈과 명예를 취하려, 자신이 지닌 무술을 믿고 링 위에 오르지만 이내 눈을 까뒤집고 내려와야 한다.
그 누군가 도포자락 휘날리며 홀연 나타나 털이 흉한 링 위의 싸움꾼을 한 번에 날려버릴 만도 한데…. 우리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던 그 많은 무림 고수들은 어디서 무엇하는지…. 그러고 보니 무술이 몰락하고 우리가 믿었던 ‘찬란한 전설’은 색이 바랬다.
다시 우리 주변을 보라. 그 많은 태권도 도장과 도복 입은 아이들이 줄어든 것 같지 않은가. 예사롭지 않다. 이종격투기에 적합한 싸움꾼을 양성하다 보면 무술과 무술은 서로의 강점만을 취하여 합쳐지고, 그러면 국적 불명의 새로운 격투기술이 개발되고, 결국 고유의 무술은 소멸할지도 모른다.
격투기에 맞는 `무술의 규격화.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누군가 그런 기술을 모아 체계화시킬 것이다. 폭력을 생으로 즐길수록 고유의 무술이 쇠락하고 있다. 그 속의 정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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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