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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사람은 누구나 취미라는 것을 하나쯤은 갖고 있고 모든 인사 카드에는 취미를 적는 빈 칸이 있다. 사람들은 나의 취미를 미술 또는 답사 정도로 지레 짐작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이 빈 칸에 바둑이라고 적는다. 미술과 답사는 나의 직업이고 나의 취미는 분명 바둑이다.
요즘도 집에 돌아오면 바둑TV를 즐겨 시청하고 주말이면 나의 영원한 호적수와 혈전을 벌인다. 나의 바둑 실력은 한국기원 공인 ‘아마 5단’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3급 갑’ 정도다. 그게 소문이 나서 바둑 TV에 출연하여 바둑을 통한 인생론 같은 것을 말한 일도 있다.
내가 바둑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못 다 배울 무궁무진한 수가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기쁨도 있다. 나는 바둑을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바둑의 규칙, 규범, 생리 심지어는 현상까지도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한다.
바둑은 우선 승패에 군소리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게임이 다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바둑처럼 한 수 한 수에 선악은 있어도 운수소관이나 우연이 개입하지 못하고 필연의 수순을 갖고 있는 게임은 드물다. 그만큼 엄정하고 공정하다.
후배가 선배를, 제자가 스승을 이기고 만다
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바둑은 곧잘 인생에 비유되고 있다.
위기10결에 나오는 바둑 격언들은 그대로 처세술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음’ 같은 가르침이 어디 바둑만의 얘기일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바둑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후배가 선배를, 제자가 스승을 이기고 만다는 사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아무런 저항 없이 세대교체를 해나가는 바둑세계처럼 세상이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둑이기에 바둑의 관전평과 해설은 대단히 명쾌하다. 사실 나는 바둑두기보다는 바둑 관전을 더 즐기는 편이다. 요즘은 바둑TV가 방영되면서 장수영 9단, 김성룡 9단, 목진석 9단 등 명해설자들이 즐비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 기보를 즐겨 읽었다. 내 경험에 의하건대 일찍이 우리나라 바둑 해설을 대중평론으로 성공시킨 분은 노영하 9단이고 바둑해설을 ‘인문평론’수준으로 끌어올린 이는 해설가 박치문이다.
바둑TV 이후로는 김성룡 9단이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고 바둑해설을 하면서 행간 행간에 인생을 집어넣는 것은 장수영 9단이 탁월하다. 이들의 바둑 해설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미술평론과 문화유산 해설도 저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장수영 9단이 이세돌 9단의 3단 시절 바둑을 해설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이세돌 3단은 굳이 이렇게 두지 않아도 이기는 바둑입니다. 아마도 노련한 9단이라면 굳이 이렇게 어려운 수를 택하지 않고 확실히 이기는 방법으로 한 칸 늦추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3단은 3단답게 그 순간의 최선의 수를 두어야 됩니다. 그래야 비록 다 이긴 이 바둑을 지더라도 앞으로 9단으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불세출의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 9단
이런 맛에 나는 바둑 해설을 즐겨 시청하고 있는데 언제였든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목진석 9단과 박치문 해설가 두 분이 진행했던 <20세기 명국>프로에서 이창호 9단과 루이나이웨이 9단이 벌인 2000년도 국수전 도전기를 해설하면서 루이나이웨이 9단의 바둑 인생을 간간히 소개하는데 그들의 바둑이야기 행간에 서려 있는 내용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FTA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중국 상하이 태생의 루이나이웨이는 바둑 역사상 다시 나오기 어려운 불세출의 여류기사이다. 18살에 중국 국가 대표선수가 된 이후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88년 나이 35세에는 9단이 되어 세계 바둑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철녀(鐵女)라고 부른다.
그렇게 잘 나가던 루이나이웨이 9단이 그녀의 바둑 인생에 고된 시련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87년 중·일 바둑대항전 때였다. 대국장은 양자강 샨사(三峽)를 따라 내려가면서 선상(船上)에서 대국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때 중국 대표부에서는 갑자기 ‘여류기사는 이 시간 이후로는 일본 남자기사들의 방에 가서는 안 된다’훈령을 내렸다. 루이는 순간 약간의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 규율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루이나이웨이, <우리 집은 어디인가> 마음산책, 2003년, 131쪽)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이려니까 바둑 대회 폐막을 하루 앞두고 일본인 요다 9단이 루이에게 재미로 속기전을 두자고 해서 복도에서 두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수락했단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요다 9단이 방으로 들어가서 두자고 해서 ‘일본 남자 기사들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훈령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바둑판을 들고 일본 남자기사 방에 들어가 바둑을 계속 두었다. 구경꾼으로 장쉬엔, 장주주, 가토 등 중국과 일본 기사들이 몰려와 흥미롭게 관전했다는 것이다.
“루이가 들어오면 일본 여류바둑은 죽는다”
그러나 그 날 밤, 루이는 대표부로부터 훈령을 어겼다고 심한 질책을 받았고, 반성문을 요구하여 제출하였으나 중국 국수전 출전 정지라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그녀는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품행이 방정치 못하여’라는 처벌 이유가 낙인처럼 되어 따라 다닌 것이 괴로웠다고 한다. 그래도 루이는 열심히 바둑을 두어 이듬해 9단으로 승단하였다.
하지만 루이에게는 좀처럼 국제전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89년 그녀는 마침내 국가대표팀을 사퇴했다. 이 때 장주주 9단은 루이를 적극 옹호하여 그 역시 대표부로부터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깊어져 훗날 부부가 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그녀에게 전국 규모의 대회 출전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고 단지 관전만 허용되었다. 오직 바둑만 열심히 두고 싶은 루이는 고민 끝에 일본으로 유학하기로 결심하고 1990년 중국을 떠났다. 일본에 와서 열심히 바둑을 공부하고 NHK방송의 바둑해설도 맡았고 또 일본어도 습득하여 자격증까지 따냈지만 본격적으로 바둑을 둘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루이는 일본기원 소속으로 기사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일본 바둑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녀 루이가 들어오면 일본의 여류 기전을 휩쓸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는 일본 여류 바둑이 죽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절망의 루이에게 그래도 기쁨이 있었던 것은 세계 바둑역사상 전설적인 인물인 오청원(吳淸源) 9단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바둑을 못 둘 바에는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에 있는 장주주와 결혼해서 거기에서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미국 비자를 신청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안 되어 불법 체류할 가능성이 많다고 번번이 거절되었다. 결국 그들은 1991년에 서류상으로 먼저 결혼을 하고, 부부관계임을 내세워 비자를 받아낸 다음 미국에서 결혼식을 갖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이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그것은 1992년 제2회 응창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 중국 선수로 장주주와 함께 초청받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신혼부부는 응창기 시합을 며칠 앞두고 일본 <바둑주보>에 ‘우리는 부부’라는 안내문을 내어 세상에 결혼 신고를 하게 되었단다.
루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찾아온 ‘응창기’라는 세계대회는 바둑올림픽이라 불리는 꿈의 무대이다. 그 응창기 제2회 대회에서 루이가 첫 판에서 붙은 상대는 공교롭게도 당시 15살의 나이로 이미 동양증권배 세계선수권을 차지하고 바야흐로 세계 바둑계의 제왕이 될 이창호였다. 이 시합에서 루이는 이창호에게 승리하였다.(이 때부터 루이나이웨이는 이창호의 천적이 된 셈이다)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루이 9단 초청 논쟁
1996년, 루이는 일본에서 기사 활동이 안 될 바에는 미국에 가서 바둑 보급을 하며 살자고 남편인 장주주와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미국 생활은 그런대로 살 만했지만 바둑 상대가 남편 이외에는 없어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해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에 미국 선수로 참가하여 1회와 3회에 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런 루이에게 기대를 부풀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차민수 5단이 루이를 한국기원의 객원기사로 초청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차민수 5단은 미국에 살면서 갬블러로 유명하여 한 때 <월드 포카> 해설을 맡기도 했던 멋쟁이에 미남인 한국인 프로기사이다.
이 때 한국기원에서는 루이나이웨이 9단의 초청을 놓고 일대 논쟁이 붙었다. 루이가 오면 그녀가 모든 여류기전 타이틀을 휩쓸어 우리 여류 바둑계가 죽을 것이다. 일본이 바로 그런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우리가 왜 초청하느냐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차민수 5단, 조훈현 9단, 김인 9단 같은 이들은 루이나이웨이 9단의 초청을 계기로 우리 여류 바둑계가 더욱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냐는 논리로 적극 찬성하였다.
이 논쟁은 요즈음 FTA 논쟁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1998년 11월 한국기원 기사들의 투표로 결정하게 되었다.(사실 루이의 초청 문제는 차민수 5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미 세 차례나 제기되었으나 워낙 반대의견이 많아 표결에 부치기도 전에 무산되었었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루이를 딛고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다
그런데 한국에 갈 수 있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루이에게 이번에는 뜻밖의 지원군들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젊은 여류기사들이었다. 박지은, 윤영선, 남치형 등 당시 대개 20세 전후의 3단들이 “우리 때문에 루이나이웨이 9단을 못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우리들이 열심히 해서 루이나이웨이 9단을 스파링 상대로 삼아 실력을 배양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당당한 소신을 펼쳤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힘이 되어 루이의 한국기원 초청은 승낙되었다.
그리하여 루이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99년 4월이었다.(그리고 한국기원의 정식기사가 된 것은 2001년이라고 한다.) 한국에 들어온 루이나이웨이 9단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본인 남자기사 방에서 친선대국 한 판 둔 것이 화가 되어 10년 간 기사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고대하던 바둑 시합에 출전하자 마치도 굶주린 사자가 닥치는 대로 먹잇감을 사냥하듯 연전연승의 가도를 달려 예상대로 2000년 여류국수전의 타이틀을 획득하더니, 곧바로 국수전에서는 예상 밖으로 당시로는 사실상 무적(無敵)이던 국수 이창호 9단을 물리치고 사상 최초로 여류기사로서 국수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2년, 3년이 지나자 그녀가 차지한 국수전을 비롯한 타이틀을 우리의 기사들이 되찾아오게 되었고, 우리의 젊은 여류기사들은 루이에게 기죽지 않고 열심히 대항했다. 오늘의 결과로 말한다면 조혜연 7단이 루이나이웨이 9단과 여류기전 타이틀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고, 박지은 6단도 한 치 밀리지 않고 승패를 나누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나라 여류기사의 실력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루이나이웨이 9단을 거부했던 일본 여류바둑은 아직도 긴 침체의 터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일러 바둑 FTA 징후군이라고 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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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