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4·19혁명 당시 한성여중 2학년생이던 진영숙은 급하게 이 글을 남기고 학우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가 군경의 총탄에 쓰러졌다. 어린 여학생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항쟁에 나선 것이다. 이처럼 4·19혁명은 단순히 3·15부정선거에 항의한 사건이 아니라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독재정권을 타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6·25전쟁 후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했다. 게다가 이승만 정부는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했고,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4할 사전투표, 3인조·5인조투표, 유권자 명부조작, 완장부대 동원,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4월 11일, 마산시위 중에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됐다.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은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온 국민이 분노한 이 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독재타도 시위로 바뀌게 된다.
마침내 4월 19일, 대학생과 중고등학생을 비롯해 서울시민 10만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당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시위대의 구호는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등 독재 규탄과 민주수호,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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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군과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며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날 하루만 사망자 1백여 명에 부상자 4백50여 명이 발생했다.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교수 3백여 명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시위에 나섰다. 이날 교수단의 시위는 자유당 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밝히고 얼마 후 비밀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권력의 2인자로 군림하던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이로써 4·19혁명은 독재정권 퇴진이라는 큰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1백86명이 사망하고 6천여 명이 부상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는 부정선거였으나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운동이 아니라 국민 주권주의에 의거한 민주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국민이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떨쳐 일어섰기 때문이다.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독재에 항거한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고,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혁명이었다. 4·19혁명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이 확산됐고 4·19혁명은 지금도 사회운동에 정신적 활력을 제공하는 구심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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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민주혁명회 박윤석 회장은 “4·19혁명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이 자라 오늘날 민주주의를 피워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 된 4·19혁명이 어느덧 50주년을 맞았다. 4월 19일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4·19혁명 유공자와 유족, 관련 단체 회원, 3부 요인 등 각계 대표와 시민, 학생 등이 참가하는 중앙기념식이 열린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도 4·19혁명 기념식과 희생자 영령 추모제가 있다.
국립 4·19민주묘지는 4·19혁명 50주년에 맞춰 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했다. 4·19혁명의 배경, 과정, 역사적 의의 등을 생생하게 알 수 있도록 유물, 동영상 증언, 관련 책자 등을 다양하게 갖췄다. 국립 4·19민주묘지 고휘주 소장은 “4·19혁명 기념관이 최상의 추모 공간, 최대의 기억 공간, 최고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우리나라가 더 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성지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4·19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4월 11일부터 18일까지 대구 2·28민주의거기념탑에서 출발해 부산, 마산, 구미, 광주, 전주, 대전, 문경, 충주 청주, 수원, 이천 등을 거쳐 서울 4·19민주묘지에 도착하는 4·19혁명 표석 설치 및 혁명장소 순례 행사를 연다.
글·이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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