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 맞은 장애인 사물놀이패 땀띠
“얼쑤!” “덩더더더 쿵더쿵.”
5월 1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지하 연습실, 사물놀이패 ‘땀띠’가 연습에 한창이었다. 장구 장단이 빠르게 휘몰아치다가 느려지더니 다시 빨라졌다. 엇박자가 나기도 했지만 어느새 소리는 합을 맞춰갔다.
‘땀띠’는 뇌병변장애, 자폐성장애, 다운증후군 등 서로 다른 중증장애를 가진 청년들로 이뤄진 국악팀이다. 꽹과리를 맡은 이석현(31) 씨는 근육이 강직돼 하반신을 제대로 못 쓰고 손이 잘 펴지지 않는 뇌병변장애가 있다. 징을 맡은 조형곤(33) 씨는 지적장애로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장구와 북을 각각 맡고 있는 박준호(34) 씨와 고태욱(32) 씨는 자폐성장애인이다.
‘땀띠’는 2003년 결성됐다. 당시 초등학교 3~5학년이던 이들은 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음악치료를 받다가 ‘원팀’으로 뭉쳤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눈 맞춤도 못하고 따로 놀던 이들이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면서 다른 사람의 파트를 기다릴 줄 알고 자신의 파트를 적절하게 찾아갈 줄도 알게 됐다. 한 번의 고갯짓으로 연주를 시작하고 눈을 맞추며 장단의 고조를 넘나드는 모습은 20년 세월이 무색하지 않게 만든다. 그때도 지금도 이들은 악보 없이 연주한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흥으로 연주를 배워 몸에 익히다보니 장단을 맞춰나가는 게 더 익숙하다.
‘땀띠’는 창단 이듬해인 2004년, 한 복지관이 주최한 장애인풍물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세계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 학생부에서 2등에 해당하는 버금상을 받는 등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2008년에는 장애인 국악팀으로는 보기 드물게 90분 단독 공연을 올렸다. 이후로도 2012년 일본 초청 오케스트라 협연,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개막 공연, 2013년 창단 10주년 공연 ‘땀띠날다’ 등 다양한 무대를 통해 관객을 만났다. 그리고 올해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땀띠’라는 이름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서울 은평구의 작은 연습실을 빌렸는데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땀에 젖은 채 연습하다 보니 팀원 모두 온몸에 땀띠가 났다. 이때 흘린 땀과 열정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팀 이름을 ‘땀띠’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름에 얽힌 사연만큼이나 역경도 많았다. 악기를 보관할 곳이 없어 지하 주차장을 빌려 보관하다 악기에 곰팡이가 슬어 못쓰게 되기도 했고 소리와 진동이 커서 연습 도중 신고가 들어와 연습을 중단한 적도 있다. 또 연습실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가다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다. 수많은 고난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지만 묵묵히 무대를 지켜왔기에 지금의 ‘땀띠’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땀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2년부터 전통 사물놀이에서 창작국악으로 영역을 넓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첫 창작국악 앨범 1집을 냈으며 2020년 2집 앨범을 냈다. 지금은 젬베, 슈르티 박스, 카혼 등 세계 각국의 악기를 배워 국악기 외에도 서너 개의 악기를 다룰 만큼 성장했다. 아이에서 청년이 된 팀원들은 모두 취직해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이 씨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해 KBS 장애인 앵커로 활동했었다. 고 씨는 장애인 최초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연희과를 졸업하는 기록을 남겼고 조 씨는 국악과를 졸업해 전문 공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박 씨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장애인 근로자로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공연과 무대를 통해 얻은 당당함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씨는 “뇌병변이 있어 다리뿐만 아니라 손도 불편하다. 재활치료로 푸는 데 한계를 느껴 악기를 배워보자 해서 건반악기를 시작했는데 손가락 마디를 넓히기가 쉽지 않았다. 장구는 채를 쥐고 치면 되니까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타악기를 두드리며 그동안 마음에 쌓인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교우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느꼈는데 감정이 해소되고 나니 자신감이 붙어 먼저 다가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땐 전교 부회장을 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 씨의 어머니 최두희 씨가 말을 거들었다. “악기를 두드리며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표출했던 것 같다.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대회에도 나가고 상도 받으며 자신감을 얻더라. 장애가 있어도 자신이 설 자리가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아 지금의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이 20년을 함께하기까지에는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 씨는 “처음에는 각자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어 안 맞는 부분도 있었다. 엇박자가 나기도 하고 합을 맞추는 데 힘들었다. 오래 공연을 하다 보니 지금은 서로에게 익숙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는 “꽹과리는 양손으로 연주하는 악기인데 오른손이 불편해서 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다리가 불편해 운동량이 적다 보니 폐활량이 부족해진다.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나 움직임이 필요한 악기를 연주할 때는 긴장이 된다”면서 어려움을 털어놨다. 조 씨는 ‘열두 발 상모돌리기’를 가장 힘든 일로 꼽았다. 이 씨가 옆에서 “형이 공연 중에 열두 발의 긴 상모를 돌리는데 처음엔 많이 어지러워하고 끈이 잘 안 돌아가 연습을 많이 했다. 상모 끝에 추가 달려 있어 자칫 잘못하면 어깨에 닿아 상처가 생긴다”며 거들었다. 박 씨는 “장구를 치면 신이 난다”면서 자신의 장구를 두드렸다. 박 씨의 어머니이자 팀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조상구 씨는 “장구를 하도 쳐서 손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라고 덧붙였다.
비장애인에게도 20년간 팀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들이 오랫동안 팀을 유지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씨는 “위기가 한 번씩 있었다. 입시 준비 때도 그렇고 직장에 다닌 후 서로 공연 시기를 맞추기 힘들어 공연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온 데는 각자의 삶을 존중해줬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개인 시간을 최대한 존중해주면서 함께 조율해나간 점이 땀띠를 오래 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했다.
조 씨가 옆에서 “땀띠가 좋아. 좋아해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조 씨의 말처럼 ‘땀띠’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팀원 모두가 ‘땀띠’를 즐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의 장애를 이해하며 하나가 됐고 재미있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달려가 신명 난 공연을 펼쳤다. 무대를 즐기는 데는 어떤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을 내려놓고 흥을 즐기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로다.
서경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