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연아.”
소치 올림픽에서 프리 스케이팅이 끝나자 거의 모든 언론들이 피겨 여왕과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김연아 선수의 메달 색깔과 판정의 공정성 문제로 세계 언론과 SNS가 뜨거웠다. 도처에서 러시아의 홈 어드밴티지를 성토하며 ‘진정한 챔피언은 연아’라고, ‘연아만이 피겨 퀸’이라고 성원했다. 가장 속상한 사람은 선수 본인이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담담했다. 메달 색깔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줬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했다. 금메달을 따러 온 것이 아니라 피겨를 즐기러 온 것이라고 했다.
김연아 선수의 이런 말들이 가슴을 울린다. 그녀는 진정으로 자기만의 피겨를 잘하고,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드문 선수다. 그의 피겨 즐기기는 단순히 이 순간을 즐기고자 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을 완전히 구현’한 가운데 창의적으로 몰입하는 과정에서의 즐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연아의 피겨가 감동적인 것도, 많은 세계인들이 그를 피겨 여왕으로 치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그 몰입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를 두고 원치않는 것을 몰아내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술인 몰입을 온몸으로 체화한 탁월한 아웃라이어(Outlier)라고 말한다고 해도 큰 잘못은 없을 터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소치에서도 김연아는 음악과 기술과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어떤 경지를 보여줬다. 그는 단지 음악에 맞춰 기술을 보여주고 연기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와 함께 했던 쇼트 프로그램도 그렇고,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안녕히 아버지)’를 배경음악으로 했던 프리 스케이팅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는 음악에 맞춰 온몸으로 펼치는 연기자에 그치지 않고, 신비롭게 온몸으로 음악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이기도 했다. 탱고와 그의 예술적 연기가 따로 들리고 따로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의 깊고 부드러운 춤사위가 하늘의 음악을 불러내고, 탱고가 그의 몸에 스며들어 몸사위를 그윽하게 했다. 부드럽고, 감미롭고, 환상적이었다. 신이 노여워하지 않을 정도에서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최상의 몸사위였고 춤사위였다. 그런가 하면 하도 애틋하고 곡진해 세상의 모든 슬픔들을 애도하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연주자가 바로 김연아 선수였다. 만약 ‘아디오스 노니노’를 작곡한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보았더라도 놀라운 감동에 젖었을 것이다. 그가 은반 위에서 연기할 때 모든 초점들은 오로지 하나로 집중된다.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다.
오로지 스케이팅에 몰입한 그의 몸 지휘에 따라 관객들도 시청자들도 놀라운 황홀경에 몰입한다.
김연아 선수가 환상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몰입’의 위력은 대단하다.
상상 그 이상으로 몰입은 우리를 새로운 진화 지평으로 이끈다. 오랫동안 몰입을 연구한 미국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몰입은 단순한 심리적 보상일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동안 연마해 온 자신의 기술을 통해서 얻게 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오랜 노력 없이 어느 순간에 몰입해야지 하고 결단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몰입과 더불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삶속에서 순간순간의 기쁨과 깊은 만족을 끌어내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부나 명예를 얻는 것에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도전을 극복하는 데서, 조화로운 복합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진화 과정의 일부가 되는 데서.”(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자기진화를 위한 몰입의 재발견>) 우리가 김연아 선수를 진정한 피겨 여왕이라고 칭송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몰입을 통해 가장 진화한 피겨 선수이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