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소식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곳, 경남 통영.
수많은 예술가로 하여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짓게 한 곳.
그곳에서 어느새 슬그머니 곁에 다가온
봄과 나란히 걸었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4848536_QZWU3KNS.jpg)
▷‘동쪽 벼랑’이라는 뜻의동피랑에서 내려다본통영 강구안 바닷가의 소박한 풍경.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시인 백석은 통영을 그렇게 읊었다. 남쪽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봄소식이 가장 먼저 도착하기에 이즈음 더욱 생각나는 곳. 통영에서 태어났거나 자랐거나, 혹은 잠시 다녀간 사람들까지도 일단 발 들여놓고 나면 내내 통영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이 소도시의 아름다움은 예술가에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짓게 했다. 박경리, 유치환, 전혁림, 이중섭, 윤이상 등은 겨울같이 척박했던 우리 삶에 예술로써 봄을 부르고 전한 이들이다. 예민한 예술가가 포착한 아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이 담긴 작품은 한편으로 위안을 주고 한편으론 현실을 깨우쳤다.
박경리와 유치환의 글을 만나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 시 ‘행복’의 배경
통영엔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이 도처에 있다. 소설 1장의 첫 소제목이 아예 ‘통영’일 정도다. 통영에서 태어나 열아홉 나이에 결혼해 황해도에 정착했던 선생은 6·25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딸과 함께 통영으로 돌아온다. 20대 중반 여인이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살림이니, 하루하루가 무릎 꺾이는 일의 연속이었을 터인데, 여기에 세 살 난 아들의 죽음이 겹쳤다. 선생은 고향을 떠났고, 기저귀 갈던 손으로 펜을 쥐었다. 그는 여성 작가가 흔치 않은 시대, 하찮게 취급받던 여성의 삶에 집중한 최초의 작가였다.
<김약국의 딸들> 주요 무대인 서문고개 산동네를 올라 박경리 선생이 살았던 곳을 찾았다. 원래 집은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들어섰다. 사라진 건 아쉽지만 이럴 땐 동네 전체가 박경리 선생의 생가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싶다. 이곳에선 아버지가 젊은 여자에게 가버린 탓에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선생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동무와 좁은 골목에서 까르르거렸을 소녀가, 길을 오르다 문득 내 인생은 언제까지 가파를까 우울해했을 사춘기가 보이는 듯하다.
고개 한쪽으로 내려가서는 백석 시인의 작품 ‘통영2’가 새겨진 시비를 만난다. 평안도 정주 태생의 그가 남쪽 작은 항구의 제목을 단 시를 3편이나 남긴 배경엔 ‘난’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1935년 스물넷의 시인은 친구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서울로 유학 온 열여덟의 고등학생 난을 보고 반했다. 1936년 1월 겨울방학에 난이 집에 갔으리라 여기고 백석은 통영에 내려왔다. 안타깝게도 난은 개학 준비로 서울로 간 뒤. 그렇게 길이 엇갈렸고, 나중에 여인은 자신을 시인에게 소개한 시인의 친구와 결혼했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036899_T9T4TDIC.jpg)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050496_MNG2GP9I.jpg)
▷청마문학관 근처에 재현해놓은 유치환 시인의 생가(위).박경리 선생이 살던서문고개 동네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주요 배경이다.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통영2’ 중) 시비 건너편에 ‘옛 장수’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충렬사 돌층계가 보인다. 백석 시인이 울 듯 울 듯 앉아서 시를 쓰던 저녁이 아직 돌층계에 고여 있다. 엇갈린 인연 하나 없는 사람이 있으랴.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 잠시 기억을 쓰다듬는 것도 통영 여행이다.
청마 유치환 시인에게도 이루지 못한 인연은 시가 되고 편지가 됐다. 백석 시비와 가까운 거리에 유치환 시인이 20년간 5000통의 편지를 부친 우체국이 있다. 그의 시 ‘행복’에 나오는 그 우체국이다. 서른여덟의 유부남 교사는 스물아홉의 미망인이자 역시 교사인 이영도 시인을 떳떳이 사랑할 수 없어 시와 편지만 썼다. 그 사랑을 긍정하긴 어려우나 어지러운 마음을 “옷자락처럼 네게로 네게로만 향하는 그리움”(‘바닷가에서’ 중)이라고 표현한 그의 시는 아름답다. 마음을 전달할 정확한 한 줄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우리 평범한 사람에게 시인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149939_VX28BMZO.jpg)
▷이중섭 화백은 통영에서 머문2년간 강구안 골목을 자주 걸어다녔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236570_5L1L2092.jpg)
▷전혁림미술관에선 평생 통영에서 살며 바다를 그린 전혁림 화백과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406627_WVKTMLL7.jpg)
▷옛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입구에 세워진 이중섭화백 소개문.
미륵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한려해상국립공원 풍경은 왜 그토록 많은 이가 통영에 몸 달아하는지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꽃 피는 게 육지라고, 봄이 육지에만 오는 줄 생각하기 쉽지만 바다에도 봄은 온다. 잡히는 생선이 달라지고 바다 색깔도 달라진다. 깊이마다 계절마다 날씨가 변할 때마다 색을 달리하는 저 바다 앞에 서면 화가는 끝내 그 빛을 화폭에 가져오고 싶어질 것이다.
전혁림과 이중섭의 그림을 만나다
그들이 토론하고 취하던 골목 어귀
통영이 낳은 대표적인 화가가 전혁림 선생이다. 1915년 태어나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평생 자연을 스승 삼아 통영 바다를 그렸다. 전혁림미술관은 선생이 30여 년 거주하며 작업한 곳에 선생과 아들 전영근 화백이 함께 지은 곳이다. 이들 부자의, 세라믹 타일로 꾸민 건물 외관 또한 이미 예술작품이다.
내부로 들어서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새파란 색이 와락 하고 관람객을 맞는다. 선생이 구사한 파란색은 각기 다른 바다로 안내한다. 어느 색은 풍덩 바닷속에 빠지게 하고, 어느 색은 절벽 위에서 바라본 듯 아련하며, 또 어느 색은 어린 시절 물장구치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평생 색을 공부하고 색으로 놀다 간 화가의 그림에서는 그의 손이 들여다보였다. 80년 동안 바다를 그린 분의 손에는 바다가 있었을 것이다. 온통 푸른 물이 든 데다 주름 팬 데에는 더 짙은 푸른색이 스몄을 것이다. 그렇게 작품을 통해 화백과 악수를 한다.
바닷가 강구안엔 이중섭 화백이 2년간 거주한 곳이 있다. 6·25전쟁 당시 피란 온 이중섭 화백과 한 살 위인 전혁림 화백은 막역한 친구로 지냈다. 1952년 늦봄부터 1954년 봄까지니까 이 화백이 1956년 마흔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기다. 가난과 전쟁 때문에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선생은 통영에서 ‘소’ 연작과 ‘달과 까마귀’ 등 대표작을 그렸다. ‘세병관 풍경’, ‘통영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처럼 통영 지명이 제목에 붙은 작품도 많다.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는 이 화백이 기거하면서 제자들에게 데생을 가르친 곳이다. 이 일대에서 그는 전혁림 화백, 유치환 시인과 술 마시고 토론하고 웃고 취하고 한탄했다. 현재는 사라진 ‘샘이집’이라는 술집에선 방바닥에 그림을 그리다 주인에게 한소리 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외로워서 비틀거리지 않고는 골목길을 걷기 어려웠을 인생이 아프다. 세월에 잊혀가던 골목은 말끔하니 재단장해 사람들을 모은다. 오래된 여관과 식당 사이에 카페와 갤러리,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곳곳에 시가 붙고 조형물이 설치돼 가볼 만하다.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는 외롭고 슬픈 화가들이 끝까지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했다. 삶이 너무 불행하여, 혹은 세상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아 포기하고 싶다가도 그 바다를 본 화가의 붓엔 기운이 들어갔다. 덕분에 바다만큼 아름다운 작품들을 갖게 됐다. 자연에도, 예술가에게도 우리는 빚을 졌다.
윤이상의 음악을 만나다
그를 음악으로 이끈 바다 소리
바다는 보기 좋은 그림일 뿐 아니라 듣기 좋은 음악이기도 하다. 바다가 내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이곳에서 저 먼 데로 데려간다. 그것이 소리가 가진 힘이다. 20세기 세계 음악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곡가 윤이상 선생 또한 통영 바다 소리를 듣고 자랐다. 태어난 곳은 경남 산청이지만 세 살 적인 1920년에 통영으로 갔고, 생전에 여러 번 통영을 고향이라고 말하며 그리워했다.
선생이 살던 동네에 세워진 윤이상기념관 전시실은 예상보다 많은 유품을 전시 중이다. 안경, 수첩, 악기, 친필 악보, 옷, 중절모에 요강까지. 뜻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애썼겠다 싶다. 한쪽에 재연해놓은 선생의 작업실 뒤편 벽엔 커다란 통영 풍경 사진이 걸려 있다. 껴안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는 저 큰 사진에서 선생의 사무치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려서부터 워낙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선생의 표현을 따르자면 “새벽 바다를 삐걱대며 멀어지는 목선(木船), 저녁에 돌아오는 어부들의 노랫소리, 물결 위로 스치는 바람, 밤마다 밤하늘의 별들에서 들려오는 신비한 우주의 소리”가 그를 음악으로 이끌었다. 음악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선생은 1956년 서른아홉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이후 독일 베를린에 자리 잡고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등을 발표하며 날로 명성이 높아졌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507501_G8NHCF6K.jpg)
▷윤이상기념관은 제대로 된간판조차 없지만 윤 선생이사용했던 안경, 수첩, 친필악보 등 전시물을 두루 갖췄다.
그러다 1967년 동백림사건이 벌어진다. 독일과 프랑스 유학생 및 교민 194명이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 활동을 했다는 이 사건으로 선생은 아내와 함께 한국에 수감됐다. 고난이 망가뜨리지 못한 사람의 얘기는 감동을 준다.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선생 부부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굳게 믿고 있소. 사랑하는 조국이 나를 오래 고생시키지 않을 것이고 또 나의 천직인 음악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줄 것으로 말이오.” “우리는 저녁마다 산보해요. (중략) 가로등을 지나 기찻길을 따라 추우나 더우나 갔다 왔다 해요. 우리 함께 오래오래 삽시다.” 편지 끝에는 ‘낭군이’라고 남겼는데, 편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아마도 ‘뽀뽀’ 같다. 인간의 연약함을 선생은 사랑과 그리움으로 이겨냈다.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기간에도 통영의 바다만큼 아름답고 새로운 음악이 통영국제음악당을 비롯한 통영 전역에 울려 퍼진다. 통영은 봄이다. 박경리 작가와 유치환·백석 시인의 글이, 전혁림·이중섭 화백의 그림이, 윤이상 작곡가의 음악이 겨울 같은 세상에 봄을 모색하고 불러왔다. 이 예술가들처럼 지금 통영은 먼저 봄이다. 그저 봄이라는 이유로 헤실거려도 실없다 소리 듣지 않는 계절, 통영을 여행하며 곁에 다가선 봄과 나란히 걸을 일이다.
![1 1](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5.03/14/20150314125819143_7FRM7ELF.png)
글 · 김현정 (KTX매거진 기자) 20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