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이야기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선수들이 만나 또 다른 사연을 만들어내는 ‘스토리 공장’이다. 2015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이하 광주U대회)에는 143개국 1만3000여 명(선수, 임원, 심판진 포함)이 참가했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는 선수도 많지만 남들과는 조금 다른, 드라마 같은 삶으로 주목받는 젊은이들도 있다.
암 투병 중인 벨기에 육상 선수
토마스 반 데르 플레센
벨기에 출신의 토마스 반 데르 플레센(25)은 2009년 유러피안주니어선수권대회 육상 10종 경기에 출전해 벨기에 육상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뛰어난 실력에 잘 생긴 외모까지 갖춘 그는 벨기에의 새로운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다. 2011년 벨기에 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7종 경기에 출전해 벨기에 최고기록을 세웠고, 그해 유러피 안U23(23세 이하)선수권대회 육상 10종 경기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2011년 대구육상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종 경기 11위에 그치며 좌절을 맛본 그는 2013년 러시아 카잔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다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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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반 데르 플레센
순탄한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예기치 않은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14년 8월이었다. 제10회 유러피안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가 도핑 테스트 양성 반응을 받은 것이다. 융모성선자극호르몬(HCG : Human Chorionic Gonadotropin) 수치가 지나치게 높은 게 문제가 됐다. 의심받을 만한 약물을 투여하지 않은 그는 정밀검사를 받았다. HCG 호르몬 수치가 높은 것은 고환암 때문이었다. 암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힘겨운 투병을 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진했다. 심각한 탈모 증세를 보이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2014년 11월 벨기에 스포츠 시상식에서 그해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든 스파이크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매년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한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 한 명만 받을 수 있는, 벨기에 스포츠 최고의 상이다.
그는 시상식에서 “이 상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치료와 노력으로 훨씬 건강해진 플레센은 “이번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삶의 새로운 목표에 도전한다. 선수로서 열심히 뛰는 모습을 통해 몸이 아픈 다른 이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고, 무엇이든 목표를 가지 고 도전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금지약물 복용으로 ‘추락한 영웅’이 됐지만 투르 드 프랑스를 잇따라 제패하며 도로사이클의 황제로 군림했던 랜스 암스트롱도 고환암을 이겨낸 스타로 주목받았다.
암과의 전쟁을 선포한
한국 태권도 인교돈
한국 선수 가운데는 태권도의 인교돈(24·한국가스공사)이 암과 싸우고 있다. 인교돈은 고교 때부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며 한국 태권도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2011년 중국 선전유니버시아드대회 때는 87㎏급에서 금메달을 땄고, 2012년 세계대학선수권대회 우승에 이어 2013년 전국체육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지난해 그의 태권도 인생은 잠시 멈췄다. 림프암 진단을 받은 뒤 1년 동안 항암 치료를 받았다. 마지막 치료를 마치고 소속 팀에 합류한 그는 대표팀 선발전을 거쳐 다시 태극 마크를 달고 광주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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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교돈 (왼쪽)
미국의 여자 태권도 선수 아지자 체임버스(26)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을 이기고 출전했다. 체임버스는 2011년 선전유니버시아드대회 때 경기 전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려다 대표팀의 방침에 따라 경기를 치렀다. 슬픔 속에서도 동메달을 따내며 태권도에서 미국에 유일한 메달을 안겼다.
체임버스는 2013년 아킬레스건이 파열돼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은 비관적인 얘기를 했지만 그는 태권도를 놓지 않았다. 수술을 받은 뒤 몇 달 동안 고통스러운 재활을 보통 선수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기간에 마치는 강인한 정신력과 열의를 보였다. 지난해 멕시코오픈에서 국제대회 복귀전을 치른 체임버스는 2009년 베오그라드(세르비아)와 2011년 선전에 이어 광주에서 세 번째 유니버시아드에 도전한다.
지진으로 삶의 터전 잃은
네팔 펜싱 대표 산지프 라마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자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광주에 온 선수들도 있다. 네팔 펜싱 대표로 출전한 산지프 라마(19)는 집이 없다. 4월에 발생해 80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강진 때 집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지진 피해가 가장 컸던 수도 카트만두 인근의 신두파촉에 살던 그의 가족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의 가족은 지금 집이 아닌 임시 거처에서 기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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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프 라마
지진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네팔 정부는 이번 대회에 선수단을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딱한 사정을 들은 대회조직위원회와 광주광역시가 네팔 대표팀에 체재비와 교통비 등을 지원해줘 33명의 선수단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라마도 지진 후 네팔 선수단이 처음 참가한 국제대회에 합류했다. 네팔 선수단은 선수촌 입촌 때 조직위에 선수촌 저층(1~3층)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지진을 겪은 탓인지 심리적으로 위축돼 빨리 밖으로 대피할 수 있는 아래층이 좋다. 아직도 지진이 날 수있다는 생각에 잠을 잘 못 잔다”고 말했다.
어렵게 한국행 비행기를 탔지만 라마는 펜싱 경기에 필요한 펜싱복, 마스크 등의 장비는 갖고 오지 못했다. 지진으로 모두 부서지고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대한펜싱협회가 손을 내밀었다. 110만 원 상당의 장비를 라마에게 제공했다. 라마는 7월 6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펜싱 남자 플뢰레 개인 예선에 출전했다. 단 1승만 거두고 5패를 당해 출전 선수 7명 중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가족들이 고생하는데 나만 좋은 곳에서 자는 게 미안하지만 한국의 따뜻한 지원과 성원이 있었기에 대회를 잘 마쳤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며 “유니버시아드 출전 대신 복구에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펜싱으로 네팔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이티 태권도 대표팀의 마르캉송 알티도르(27)도 라마처럼 2010년 아이티 대지진으로 집이 무너졌다. 당장 훈련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그러나 꿈을 잃지 않고 태권도에 열중했다. 이번 대회 출전도 그를 눈여겨본 주위 사람들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줘서 이뤄졌다. 알티도르는 이번 대회 유일한 아이티 선수다.
가난과 싸우는 바베이도스 육상 선수
팔론 포르데
가난과 싸우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에 나선 젊은이들도 있다. 바베이도스의 육상 선수 팔론 포르데(25)가 그런 선수다. 바베이도스는 중남미 베네수엘라 북동쪽 카리브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다. 해변이 아름다워 전 세계 부자들의 휴가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포르데에게는 남의 나라 얘기다. 농구를 하다 육상으로 종목을 바꾼 포르데는 바베이도스의 웨스트 인디스대에 재학 중이다. 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부모와 남동생,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아기까지 다섯 식구를 보살피고 있다. 어머니가 투병 중이라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하다.
포르데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체육을 전공하고 있다. 돈이 없어 굶는 날도 많았다는 포르데는 이번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친구에게 육상 스파이크를 빌렸다. 자국에서 훈련을 하다 자신의 스파이크가 찢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린 신발도 광주에서 훈련하던 중 찢어져 수선을 맡겨야 했다. 해당 브랜드의 애프터서비스를 받으려면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했기에 그는 선수촌 근처 구두 수선집에서 스파이크를 꿰매 훈련을 계속했다. 다행히 ‘찢어진 스파이크’를 신고 운동을 한다는 사연이 알려지자 한국의 한 업체가 그에게 새 스파이크를 주기로 했다. 바베이도스 선수단을 지원하는 아타쉐(통역 등 전담 지원요원)는 “포르데는 항상 밝고 재미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긍정적인 선수”라고 말했다.
한국의 충남 천안에 있는 나사렛대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칼림머바 모흐루(21·타지키스탄) 역시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운동 후 저녁 늦게까지 식당 청소를 병행하면서도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타지키스탄 태권도 팀을 이끄는 전창휘 감독이 2010년 키(186cm)를보고 낙점한 덕분에 16세 소녀는 태권도에 입문했다. 키는 커도 유연성과 운동 능력이 부족했던 모흐루는 연습으로 이 약점을 극복했다. 키가 더 자라 193cm가 된 그는 지난해 인천아시아경기대회 태권도 여자 73kg급에서 동메달을 따며 전 감독을 웃게 했다. 모흐루는 지난해 1월 나사렛대 태권도학과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등록금과 기본적인 생활비를 받기에 ‘태권도 유학’이 가능했다.
외모만큼 튀는 호주 육상 선수
미셸 제네커
눈에 띄는 외모와 톡톡 튀는 행동으로 화제를 모은 선수도 있다. 호주의 육상 스타 미셸 제네커(22)가 대표적이다. 이번 대회 자원봉사자들과 조직위 관계자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조직위 관계자는 “제네커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훈련장 밖에서 기다리는 자원봉사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7월 7일 광주U대회 주경 기장에서 훈련 중인 그에게 10여 명의 자원봉사자는 물론 선수들도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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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제네커
제네커는 2012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육상선수권 대회에서 경기 전 골반을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한 독특한 몸 풀기 동작을 했다. 당시 모습은 유튜브에 올라 조회 수만 2700만 건을 넘겼다. 그는 “6년 전부터 긴장을 풀기 위해 해왔던 동작이 이렇게 주목을 받을지 몰랐다”고 말했다. 덕분에 그는 2013년 미국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 수영복 모델로 나서는 등 각종 화보의 단골 모델이 됐다. 2013년에는 한 글로벌 남성잡지가 전 세계 남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원하는 여성’ 10위로 꼽히기도 했다.
외모로 관심을 끌었지만 제네커는 대단한 재원이다. 호주의 명문 시드니대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메카트로닉스(기계전자공학)를 전공하고 있다. 그는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대회가 많은 학기에는 수강을 적게 하며 조절을 하고 있다. 내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을 위해 올해는 훈련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상승세인 실력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까지는 기록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3월 호주육상선수권대회 허들 100m에서 처음으로 13초대를 깨며 12초 82로 자신의 최고기록을 세웠다. 한국 육상여자 허들 100m 최고기록은 여전히 13초대에 머물고 있다.
호주에서 제네커는 2012년 런던올림픽 허들 100m 금메달리스트인 샐리 피어슨(29)의 뒤를 이을 선수로 꼽힌다. 그는 “실력보다 외모로 먼저 주목을 받았지만 올해부터는 다를 것이다. 올림픽에서 실력으로 이름을 알리겠다”며 “한국에 온 것은 처음인데 기분이 좋다. 경기가 끝나면 한국 음식을 먹는 등의 체험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글 · 이승건 (동아일보 기자) 2015.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