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3월의 봄에 경남 통영에서는 국제음악제가 열렸다. 벌써 열여섯 번째다. 1999년 ‘통영현대음악제’로 시작해 2002년 ‘통영국제음악제’로 이름을 바꾸고 해마다 열리는 이 행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통영은 그의 고향이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음악제도 열리고 윤이상 거리도 만들었다.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다.
![윤이상 윤이상](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7.07/23/20170723153857188_V6FB0JG9.jpg)
▶ 윤이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7월 14일에는 최수열이 지휘하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화염 속의 천사’를 ‘삶과 죽음의 변용’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202회 정기연주회 무대에 올렸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94년 독일에서 완성한 윤이상의 마지막 관현악곡이다. 전체 16분 길이에 6분가량의 소프라노와 여성합창, 그리고 5대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가 붙어 있는 이 곡을 그는 스스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라고 했다.
금관악기의 고통스러운 불협화음, 오보에의 비통한 울음, 팀파니의 무시무시한 공포의 타격, 그리고 슬프지만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하프의 가늘고 아름다운 떨림이 명징하면서도 독창적인 표현으로 감정과 주제를 깊이 드러내는 윤이상의 말년 음악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곡을 만들어진 지 23년이 되도록 실제 음악회에선 말할 것도 없고 녹음 음원으로도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눈을 감기 두 달 전인 1995년 4월 5일, 자신의 작품 연구에 1인자로 꼽히는 독일의 발터-볼프강 슈파러(Walter-Wolfgang Sparrer)와 나눈 ‘마지막 대화’(<음악과 민족> 11호, 차호성 편역)에서 윤이상은 이 작품의 배경이 군부독재 말기인 1991년 노태우정권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사회적인 새 출발을 권유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대중 앞에서 분신으로 죽음을 택해도 “사회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이 젊은이들의 행동을 인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분명히 개인적인 확신에서 이루어졌던 행위에 대해 다르게 보려는 노력도 없는 것”을 보며 윤이상은 이 곡을 만들 생각을 굳히게 됐다고 한다.
‘화염 속의 천사’에서 천사는 실재의 인간이며, 이 실재의 인간은 순수하고 사심이 없으며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또는 종교적으로 연관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화염 속의 천사’는 “그들의 행위를 음악을 통해 하나의 기념으로서 되새기며,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이 그들 사회의 희생자가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윤이상은 말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 자신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독재정권이 낳은 비극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윤이상에게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81년에 관현악곡 ‘광주여 영원히!’에서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을 격렬한 표현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윤이상은 다분히 자신의 정치성을 내보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배척받았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관현악곡은 그 어떤 정치적 영향이나 선동적 입장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나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작곡가로서 이 작품을 다뤘습니다. ‘화염 속의 천사’는 내가 나의 민족을 위해 작곡한 마지막 관현악 작품입니다. 나는 분신으로 죽어간 젊은이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려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들 중의 그 누구도 성인으로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천성과 자신들의 순수한 영혼의 열정과 걸맞게 행동했던,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사실을 우리는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윤이상은 현대사의 비극적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우리에게 음악적으로 기억하도록 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다채롭고 독창적이면서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통음악의 연주법에 서양음악의 구조를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보다 친근하고 구체적인 감정과 이미지로 다가오게 했다. 윤이상 역시 한국인의 피와 정서를 가진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윤이상이 세계 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란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일찍이 음악에 대한 천재성을 발휘해 일본, 프랑스와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19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 음악계의 주목을 받은 그에게 남북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은 굴레이자 비극이었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동백림 사건)은 그에게 평생 씻지 못할 상처가 됐다. 그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세계 음악계의 구명운동으로 2년 만에 석방된 그는 조국을 떠났고 1971년 독일에 귀화했다. 비록 조국은 떠났지만 누구보다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과 연주 기법을 서양 현대음악에 심어 넣은 윤이상. 그러나 그는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죽어서도 이국땅에 묻혀 있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의 비극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를 우리 곁으로 불러오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이데올로기와 과거사에 짓눌려 그를 외면한 채 가슴을 열고 그의 음악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를 추모하는 것조차 정치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그를 ‘이념’에서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그가 역사와 조국에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역사와 조국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모른다. 2006년 참여정부가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외연과 범죄 내용을 확대, 과장했다”고 발표한 것처럼 동베를린 사건이야말로 독재와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가 낳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민적 합의나 평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는 역사가 됐고, 해마다 통영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음악은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다. 남북의 경계인으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조국의 울타리에서 밀어내고, 그동안 기념사업조차 제대로 못하게 만든 것은 개인을 넘어 민족의 불행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그가 남긴 세계 속의 한국 음악의 존재 가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예술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애국이다.” 윤이상에 대해 백남준이 남긴 말이다.
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