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정부가 공식적으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고 포상하는 제48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에서 이색 수상자가 나왔다. ‘대산문화재단’이었다. 5개 분야(문화, 미술, 음악, 연극·무용, 문학)에 수여하는 상에 사람이 아닌 기관(재단)이 받은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으레 작가가 주인공인 문학 분야에서.
그러나 지난 24년간 대산문화재단의 역사와 발자취 그리고 현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상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 사기업이 그처럼 변함없는 순수와 열정으로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고 가꾸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92년 “우리 정신문화의 뿌리이자 문화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문학 분야를 중심으로 공익사업을 펼치겠다”며 창립한 대산문화재단은 목표를 크게 두 가지로 잡았다. 하나는 창작문화 창달, 또 하나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다. ‘문화의 시대’를 견인하고, 문화가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적 흐름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교보문고란 대형서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산문화재단은 직접적인 기업의 이익과 무관한 대산문학상, 대산창작기금, 청소년문학상 등을 만들었고 문학에 대한 일편단심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중에서 누가 뭐래도 이 재단의 가장 큰 업적과 존재가치는 한국 문학을 세계로 보내고 세계 문학을 한국으로 부른, 바로 ‘번역’일 것이다.
![고은의 시 조국의 별 독일번역본 이미지 고은의 시 조국의 별 독일번역본 이미지](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7.01/30/20170130024608657_K38H09W4.jpg)
▶ 독일 출판사 주어캄프에서 번역 발간한 고은의 시 <조국의 별>과 이문열 소설<시인>
한국 문학의 해외 번역
아무도 관심 없고 어렵고 생색도 안 나는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을 대산문화재단은 장기적 안목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묵묵히, 끈질기게 해나갔다. 한국 문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함께 공유하는 길이기 때문에.
지난해 우리 문학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어느 나라보다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영국이 자랑하는 100% 순수 문학상이기에 수상이 더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물론 수상의 이유는 “치밀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작품의 완성도”였지만,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운 28세 여성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힘도 컸다. 그의 번역으로 <채식주의자>는 “영어로 완전히 제대로 된 목소리를 갖췄다”고 할 만큼 영문학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한국 문학이 세계로 나아가고 작품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켜준 셈이다.
데보라 스미스 같은 한국 문학 마니아이자 뛰어난 번역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거기에는 492종의 번역 지원과 290종의 해외 출판이라는 대산문화재단의 열정과 투자가 있었다. 고은의 시 <조국의 별>과 이문열의 소설 <시인>이 독일 유명 출판사 주어캄프에서 독일어로 발간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이승우의 소설 <생의 이면> 프랑스판이 ‘페미나상’ 외국 소설 부문 최종 후보작에 오른 데는 대산문화재단의 노력이 있었다. <채식주의자>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문학상과 달리 대산문학상도 ‘번역’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수상작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고 있다. 또 우리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한 작품에 주는 ‘번역상’ 부문도 있어 지금까지 20개 작품에 36명의 번역가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산세계문학총서 대산세계문학총서](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7.01/30/20170130024647443_O9OP1J72.jpg)
▶ 대산세계문학총서 ⓒ대산문화재단
해외 문학의 국내 번역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부터 ‘외국 문학 번역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지금처럼 그때도 실업문제가 심각했고, 특히 인문학 분야는 갈 곳 없는 고학력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전공을 살려서 일할 기회를 주자.
또 하나는 21세기를 코앞에 두고도 여전히 일제강점기 때의 산물인 서구 대작 중심의 번역에서 벗어나자. 그래서 일본어판 재번역이 아닌, 원어 작품의 직접 번역과 완역 출판을 지원하기로 했다. 우수한 외국 문학을 올바로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한국 문학과 교류의 장을 넓히기 위해, 척박한 국내 번역 출판물의 토양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대산세계문학총서’는 그렇게 태어났다. 작품부터 기존 세계 문학 시리즈와 달랐다. 세계 고전이면서 너무 어려워서, 길어서, 아니면 상업성이 없어서 소개하지 못한 작품들, 단지 우리에게 멀고 생소한 나라의 문학이라고 외면했던 작품들로, 90%가 국내 초역이었다.
작품을 고르고 번역자를 공모해 작업을 시작한 지 2년. 2001년 6월이 되어서야 18세기 영국의 전위소설인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 스페인어로 쓴 첫 멕시코 소설인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의 <페리키요 사르니엔토> 등 5편이 선을 보였다. 그리고 15년 동안 번역비와 출판비를 지원해 117종 140권을 펴냈다. 유일한 베스트셀러라고 해야 5만 권이 팔린 <서유기>(전 10권) 정도. 이 역시 대중성을 노린 게 아닌 ‘최초 완역’의 의미로 출판했다.
어느 문인은 문학적 시야를 깊게, 넓게 하려면 ‘대산세계문학총서’를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지역, 언어권의 깊이 있는 작품이 폭넓은 문학 체험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우신예찬>은 다른 출판사 번역본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에라스무스가 극찬한 프랑스 풍자소설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은 오직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일본 고전문학의 한 날개인 <헤이케 이야기>, 질곡의 유고 현대사를 그린 노벨상 수상작가 이보 안드리치의 명작 <드리나 강의 다리>도 그렇다.
이 두 가지 ‘번역’의 과거와 현재만으로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않고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역량 있는 ‘3세대 번역가’, 즉 한국 문학을 전공한 전문 원어민 번역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단다. 한국 문학으로서는 너무나 기쁘고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