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문사회연구회 정해구 이사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정해구 이사장 인터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7월 2일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우리나라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1964년 UNCTAD 창설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국민적 자긍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지위 격상은 급성장한 경제 규모와 국제적 위상 제고 등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경제와 외교 등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선진국으로 분류됐다. 이런 점에서 이번 지위 변경 결정은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는 걸 의미한다.
선진국 지위 격상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리더십의 정립과 함께 우리나라의 역할과 책임도 그만큼 커졌다. 개도국에 대한 경제 지원과 협력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하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가교 역할도 더 많이 요구받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얻는 유·무형적 혜택과 권리도 무시할 수 없다. 국내적으로도 선진국 위상에 걸맞게 국민의 삶의 질이 경제·사회적으로 두루 향상될 수 있도록 정부는 노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바야흐로 선진국의 길로 접어든 대한민국. 그에 따른 새로운 리더십 정립과 국제적 책임 및 역할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195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우리나라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1964년 이 기구가 창설된 이후 처음이다. 이로써 미국·영국·독일 등이 포함된 선진국 그룹 B에 속한 나라는 32개국이 됐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2020년 세계 10위이며 1인당 국민소득(GNI)은 주요 7개국(G7) 중 하나인 이탈리아를 넘어섰다. 이미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았지만 이번 UNCTAD의 결정으로 유엔 안에서 공식적으로 선진국 대우를 받게 됐으며 우리 스스로 선진국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7월 30일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을 만나 선진국의 의미와 앞으로 과제 등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교육개발원, 한국노동연구원 등 경제·인문·사회 분야 26개 국책 연구기관을 관리·지원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이과에 해당한다면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문과라고 볼 수 있다.
▶8월 6일 서울 송파구 송파체육문화회관에 마련된 코로나19 백신 접종센터에서 접종을 마친 시민들이 이상반응 관찰 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
우리 국민은 공동체 전체 위해 협조
정해구 이사장은 UNCTAD의 결정에 대해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는 6·25전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가장 강한 이미지였을 것”이라며 “그런데 최근 디지털 발전과 코로나19 위기 대처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된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주요 7개국(G7) 회의에 2년 연속 초청받아 미국·영국 등에 대우받는 모습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며 “UNCTAD에서도 우리나라가 더 이상 개도국 위치에 있지 말고 선진국 그룹에서 역할을 하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면서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 시민의식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들을 보면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는데 우리 국민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 열심히 협조해야겠다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며 “예를 들어 마스크를 쓸 때도 내가 병에 걸린다는 생각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공동체 의식이 더 컸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늘 선진국을 따라가는 입장이다 보니 우리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잘 안 했던 것 같다”며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주변을 돌아보니 우리가 저들보다 더 나은 측면이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면에서 상황에 따라 우리가 더 앞서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2일(현지시간) 영국 콘월 카비스베이 양자회담장 앞에서 참가국 정상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이동하고 있다.│청와대
사회 전체가 함께 사는 연대의식 필요
그러나 정 이사장은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부분에서 앞서 있다고 자만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양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발전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다.
선진국은 명확한 개념이 따로 있다기보다 역사적으로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먼저 발전했던 나라들을 통상 의미한다. 경제 부문뿐 아니라 삶의 질 문제, 문화·정치 측면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해 최상위 국가들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나라 복지 수준은 다른 선진국에 못 미친다”며 “양적인 측면에선 선진국을 따라잡았지만 질적인 측면, 개인의 삶의 질은 그만큼 올라오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빈부 격차 속에서 사회 약자들의 삶의 질은 선진국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조금은 거칠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굉장히 높다. 1년 사망자가 30만 명 정도인데 그중 자살하는 사람은 1만 4000명에 가깝다. 다시 말해 30명 중 적어도 1명 이상이 자살한다는 의미다. 굉장히 많은 숫자”라며 “우리 사회가 빠르게 양적 성장을 하다 보니 여전히 거친 부분이 남아 있다. 그런 부분은 앞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최근 제기되는 우리 사회의 공정·정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열심히 했는데도 그만큼 대가가 돌아오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고 사회적 갈등이 많다”며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도 선진국이 비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격차를 감소하고 경쟁을 줄여줘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사회·국민 모두가 명실상부 선진국 주체가 되려면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잘살 수 있도록 공동체나 연대의식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해법을 제시했다.
신남방정책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서울을 중심으로 초집중화되면서 주택가격이 급등하는 현상과 교육이 학벌로 변질되는 문제도 시급한 해결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교육은 그동안 우리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기반인 동시에 앞으로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그럼에도 교육이 학벌이라는 신분을 얻는 수단이 되면서 일부 사람들만 혜택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대외적으로는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좀 더 적극적인 주도권을 쥘 것을 주문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식민지배와 전쟁, 이후 미·중·일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만 생각했지만 이제 좀 더 당당하게 대외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이 강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미국과 중국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 “약소국의 조그만 나라가 아니고 선진국들이 주시하는 국가라고 볼 수 있고 이런 상황은 우리한테 일종의 기회”라며 “그런 측면에서 조금 당당한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에 오른 국가로 대외정책의 목표나 가치에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체적으로 강대국들의 대외정책은 자기 힘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약소국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천명한 신남방정책을 좀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평화·공동번영 등 신남방정책은 우리의 목표일 뿐 아니라 세계인의 목표”라며 “우리나라는 약소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대외정책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가지면서 인류 보편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외정책에서도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남방정책은 문 대통령이 2017년 11월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포럼’ 기조연설을 통해 공식 천명한 정책으로 사람(People)·평화(Peace)·공동번영(Prosperity) 등 이른바 ‘3P’를 핵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과 협력 수준을 높여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4강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 핵심이다. 신남방정책으로 아세안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고 안보 차원에서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아세안과 북핵 대응 공조와 협력을 이끈다는 구상이다.
코로나19 끝나면 한번 더 도약 계기
정 이사장은 현재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자영업자·임시직·일용직·프리랜서 등을 안타까워하면서 코로나19 상황이 끝나면 우리나라가 한번 더 도약할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빠른 경제 회복과 앞선 디지털 전환 등이 다른 나라에 앞서나갈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또 북방외교 측면에서 가능성도 열어놨다. “10년 또는 20년 뒤에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북관계가 잘 풀려 우리가 유라시아(유럽+아시아) 측과 연결되면 다시 한 번 도약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철도 등으로 유라시아 경제권을 이루면 2050년에는 세계 5위에 오를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정해구 이사장은 “우리나라는 저출생·고령화로 인구 문제, 4차 산업혁명 추진과 그것이 초래할 급격한 변화의 문제, 인류 생존의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환경문제, 미중 간 패권 경쟁을 비롯한 국제 질서의 급속한 변화 등 전환기를 맞고 있다”며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26개 소속 연구기관은 이런 전환기에 경제·인문사회 분야의 정책 연구를 통해 국가 정책을 지원하는 역할을 적극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글 이찬영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