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 접할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체계적인 실록의 보관 시스템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조선 전기부터 실록을 1부만 만들지 않고 4부씩 제작했다.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만들었지만 1부만 만들어 실록이 전쟁의 와중에 완전히 사라진 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였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봉안하는 의식을 치른 후에 한양의 춘추관(春秋館)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을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의 춘추관 이외에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지역 안배를 한 후 지방에도 실록을 보관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지방의 중심지는 전쟁의 위협, 화재와 약탈 등 분실 위험이 제기되었고, 이곳이 사고 설치에 적합한지 여부가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세조 대에 양성지와 같은 학자는 산간지역에 사고를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실록 보관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하게 했다.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전주 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소실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완성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는 유일하게 전주 사고 1질만이 남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실록을 모두 산으로 가게 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험한 산지에 실록을 보관하는 작업은 관리에 있어서 물적으로나 인적으로 많은 공력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후대에까지 길이 실록을 보관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결국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의 춘추관 사고 이외에 강화의 마니산, 평안 영변의 묘향산, 경상 봉화의 태백산, 강원 평창의 오대산에 각각 사고를 설치하고 이곳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실록이 모두 산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묘향산 사고의 실록은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 경로가 되는 곳이라 하여 다시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옮겨졌으며, 강화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정족산성으로 둘러싸인 정족산이 안전하다 하여 현종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조선 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적상산·태백산·오대산으로 정착되었고 이 시스템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중 태백산과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현재 국가기록원(부산센터)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 보관하고 있다.
사고를 산간지역에 설치한 또 다른 이유는 인근에 사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고를 관리하고 지키는 사찰을 수호사찰이라 했는데 정족산의 전등사, 오대산의 월정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 안국사가 수호사찰의 기능을 했다. 왕실에서는 수호사찰에 지원을 해 주면서 사고 관리를 철저히 하게 했다.
사고 건물은 2층이었으며 주변에는 방화벽을 설치해 화재를 예방하였다. 사고에는 3년 정도 주기로 사관을 파견하여 실록을 햇볕과 바람에 말려 방충·방습하는 포쇄(曝 )작업을 지휘하게 하였다. 실록을 봉안하거나 포쇄한 경우 사관은 장서점검 기록부에 해당하는 실록형지안(實錄形止案)을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사고의 문은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이 아니면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중앙의 사관을 맞이한 지방관들 또한 이들을 극진히 환대하는 등 실록의 보존은 누구에게나 중대사로 인식되었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조선시대에 실록을 중시한 모습은 조선시대의 지방 지도에 사고의 모습을 꼭 그려넣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김홍도의 그림 중에 오대산 사고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주목된다.
조선 후기 산간지역에 사고를 설치한 선조들의 치열한 보존정신으로 물려받은 <조선왕조실록>. 실록을 보다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할 책무는 이제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