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게생을 마감한 거대한 별
공군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한 남자를 망상에 사로잡히게 한 요소는 한둘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침실 벽 속에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자신이 그들의 왕이라는 환상을 간직하고 있던, 독실한 장로교인으로서 그리스도에 귀의한, 대학 시절 바람을 피운 데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한 바 있는 이 불안한 젊은이의 이름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Mark David Chapman)이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삶의 지침서처럼 여기며 작품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롤모델로 삼았던 그의 ‘살아 있는’ 영웅은 다름 아닌 존 레논이었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보잘것없던 스물다섯 살 남자가 자신의 우상을 살해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줄은.
▶ John Lennon / Plastic Ono Band의 앨범
비틀스의 광팬이었으며 특히 존 레논을 숭배했던 그의 존에 대한 애정은 기독교에 빠져들게 된 이후 적개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존의 그 유명한 “(비틀스는) 예수보다 더 인기가 있다”는 발언에 분노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세요’(‘Imagine’)라고 노래한 존이 실상은 수많은 것을 소유한 백만장자라는 사실에 화가 났으며, ‘성경도, 예수도, 비틀스도 믿지 않는’(‘God’) 건방진 사내의 모든 ‘위선’에 격분했다. 일체의 허위와 위선, 기만을 경멸한 홀든 콜필드라도 된 양, 이 망상분열 및 조울증 환자는 몇 달에 걸쳐 존 레논의 살인을 준비한다. 1980년 12월 8일 늦은 오후, 마크 채프먼은 뉴욕 맨해튼 서부의 고급 아파트 다코타 빌딩을 나서던 존으로부터 3주 전 발매된 존 레논과 요코 오노의 앨범 /double>에 사인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50분, 요코와 함께 귀가하여 집으로 들어서던 존의 뒤로 다가간 마크는 그의 등에 38스페셜 리볼버 다섯 발을 발사했다. 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마크 채프먼은 그 자리에 서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 대중음악 사상 더없이 위대한 뮤지션으로 손꼽히는 거대한 별은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쳤다.
존 레논은 초기 비틀스의 로큰롤과 급진적이고 다채로운 실험으로 대표되는 중반기 비틀스의 진보적 사운드를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그가 약물에 탐닉하고 요코 오노에 대한 집착이 커지기 이전, 밴드에서 존의 영향력과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물론 존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과 음악 스타일을 표출한 폴 매카트니의 천재성이 그와 경쟁과 반목을 통한 시너지를 이루며 어떻게 비틀스의 사운드를 완성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시너지에서 비롯된 다채로운 사운드와 진보된 녹음 기술, 존 특유의 몽롱하고 환각적인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어우러지는,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언어를 닮은 상징과 메타포로 가득한 노랫말 등 전에 없던 요소들의 조화는 이후 대중음악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존의 영원한 동반자, 강한 자아와 예술가로서의 꿈과 고집을 지니고 있던 요고 오노는 존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인물이다. 그녀는 존의 음악은 물론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회에 대한 시각, 가치관과 그 표출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존이 요코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반전(反戰)을 외치고, 1969년 3월 결혼 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과 캐나다 몬트리올의 퀸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행한 평화를 위한 ‘베드인(Bed-In; 침대에 누워 하는 시위)’,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제대로 소통하자고 주장하며 자루 속에 들어간 ‘배기즘(Bagism)’ 퍼포먼스 등 적극적 참여 예술과 행동주의를 펼친 바탕에는 요코의 존재가 자리한다. 요코 오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존 레논의 인생과 음악적 영감의 뿌리를 이루었으며 그의 영혼은 늘 요코를 향하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를 ‘세기의 사랑’이라 일컫는다거나 ‘소울메이트(soulmate)’라는 표현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55위
솔로 뮤지션으로서 존 레논의 정체성은 비틀스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로큰롤에 열광했던 이 천재는 남다른 재능과 위트,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 웅크리고 있던 반골 기질과 창의성은 요코와 만난 이후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 확고한 방향성을 갖춘 채 늘 자신의 철학과 관심사, 감정을 음악과 노랫말에 담아 숨김 없이 토해냈다. 개인적 이야기와 정치적 주제를 하나로 교묘하게 엮어내는 솜씨는 그가 지닌 탁월한 재능의 하나였다. 그의 음악은 대체로 록과 팝의 경계에 위치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밴조를 배우고 초중반기 비틀스에서 리듬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스스로도 인정했듯 특별히 뛰어난 테크닉을 지닌 연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때로 정교하고 섬세한 배킹을 이루거나 때로 날것 그대로의 외침을 거침없이 담아내는 그의 기타는 각각의 곡들 속에서 완벽한 조화를 통해 곡에 강렬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는 최고의 멜로디 메이커로서, 그리고 음악적 아이디어를 가장 진보적이고 또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던 그의 역량과 무관하지 않다. 롤링 스톤 지는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 중 존 레논을 55위에 랭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존 레논 음악의 가장 큰 특징과 뚜렷한 색채의 중심에 자리하는 건 역시 목소리다. 뾰족하고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지적 매력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거친 쇳소리를 연상케 하며 지극히 냉소적이고 동시에 짙은 호소력을 지닌 그의 보컬은 극단을 오가는 널따란 감정의 범위를 아우르며 원초적 외침에서 불안한 속삭임, 달콤하고 따사로운 연가(戀歌)에 이르는 여러 색깔을 지닌 채 숱한 이들을 매혹시켰다(롤링 스톤 지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의 리스트에는 존 레논의 이름이 5위에 올라 있다).
이런 모든 평가의 반대편에서 존 레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관점 또한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존의 거침없는 발언과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 위선적인 모습에 강한 비난을 보낸다. 평범하지 않은 성격을 지닌 그는 일찍이 부와 명예를 거머쥔 후 매 순간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록 스타로 살아가야 했고, 그의 모든 언행은 대부분 단편적인 정보로서 대중에게 노출되었다. 존에게 쏟아졌던 비방과 악담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과정에서 부풀려지거나 왜곡된 내용 또는 시기와 질시, 막연한 증오에 근거하지만, 실제로 그의 성격과 행동에서 어두운 측면은 존재한다. 예컨대 애초 질투심이 많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던 그가 종종 아내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이나 첫아들인 줄리안에게 애정을 주지 않은 아빠였다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더불어 존 레논이 여러 부정적인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형하여 거짓말을 일삼았다거나, 사랑과 평화의 전도사이자 의미 있는 정치적 행동주의자라는 정체성이 실은 그저 관심을 얻기 위해 멋져 보이는 유행에 편승한 유희와 같았고, 그의 이미지는 과대 포장된 것이었다는 의견, 또 그가 늘 돈과 명성을 좇아다녔을 뿐이라는 주장 등은 그에 대한 비난의 핵심적 내용들이다. 그리고 마크 채프먼이 존 레논 살인의 이유로 언급했던, 이 모든 걸 포괄하는 말인 ‘위선’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의 주된 공격 포인트이기도 하다.
1998년 줄리안 레논이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라프’와 가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보자. “제가 보기에 그는 위선자였습니다. 아빠는 세상을 향해 큰 목소리로 평화와 사랑을 외쳤지만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들, 즉 아내와 아들에게는 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가정 내에서 소통하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고 이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할까요?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는 타인을 배려하거나 도덕과 규범을 중시하고 언행일치를 이루는 그런 이상적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가이자 섬세하고 열정적인 감성을 지닌 뮤지션이었던 존 레논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은 신선한 감흥과 짜릿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토록 멋지고 훌륭한 음악을 남겼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로부터 비롯되는 존경과 사랑이 향하는 곳은 이러한 그의 음악이 아니던가. 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유산이 전하는 마법과 같은 매혹에서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김경진 |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