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영화 속 옛 음악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러 갔다. 아니, 사실은 내가 아들을 꼬드겼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사춘기가 지난 자식들에게 외면당하고 허망한 외로움을 맛보게 되는 대한민국 아빠의 숙명에서 벗어나고자,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적어도 한두 개의 공통분모를 만들고자 애썼다. 그 몇 가지 대상은 여행과 책, 음악과 영화였다. 아직 초등학생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음악과 책은 그다지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처럼 아이는 아이돌에 열광하고 지루한 활자 매체보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영상 콘텐츠에 빠져들어 간다. 여행은 숱하게 다녔다. 나중에라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은 잘 쌓여가고 있다. 그리고 영화. 이건 유아 때부터 특히 공을 들인 부분이기도 하다. 다행히 이 녀석은 또래들이 모르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부터 디즈니와 픽사, 지브리 애니메이션, 이소룡과 성룡, 스필버그와 마블 시리즈에 큰 흥미를 보여왔고 영화가 주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듯하다. 그 덕분에 때로 영화의 힘을 빌려 음악을 주입시킨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의 영화는 아들에게 옛 음악 이야기를 할 기회를 자연스럽게 전해준다. 여러 MCU 영화에는 의외의 음악이 사용되어 즐거움을 주는데, 이번에 본 ‘토르: 라그나로크’에는 토르의 전투 신에 레드 제플린의 ‘Immigrant Song’이 등장했다. 잊을 수 없는 스타카토 리프로 전개되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옛 하드 록 사운드가 화려한 장면에 그렇게나 멋지게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탄했다(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47년 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빌보드 ‘하드록 디지털 노래 판매’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곡은 지난 봄 보았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에서 코끝을 찡하게 했던 캣 스티븐스의 ‘Father And Son’과 더불어 아들의 휴대폰 플레이리스트에 거부감 없이 자리하게 되었다. ‘아이언 맨’의 AC/DC부터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라몬스에 이르기까지, 마블은 탁월한 음악 선곡 역량을 자랑한다. 할리우드 흥행의 중심에 자리한 마블은 이제 다양한 영화에서 옛 음악을 만나는 경우가 낯설지 않다. 과거의 작품을 리부트 형식으로 다시 제작하거나 오래전의 콘텐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작품이 대세가 돼버린 이 레트로 시대에 걸맞은 현상이 아닌가 싶다. 아이에게 영화와 장면에 흐르던 음악 이야기를 해주며 다시금 영화음악이 지니는 강력한 매혹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난여름 음악 좋아하는 이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베이비 드라이버’에는 밥 앤드 얼의 ‘Harlem Shuffle’ 같은 1960년대 R&B를 비롯하여 비치 보이스, 티렉스, 퀸과 사이먼 앤드 가펑클, 그리고 블러와 벡, 런 더 주얼스와 스카이 페레이라에 이르기까지 반세기를 아우르는 여러 시대의 다채로운 노래가 시종일관 등장한다. 주요 장면을 채우는 이 다양한 음악들은 강한 즐거움을 넘어 짜릿한 쾌감으로 이어진다. 이는 음악만으로 느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감흥이다. 예컨대 새로운 ‘혹성탈출’ 시리즈 3편에서 흐르는 지미 헨드릭스의 ‘Hey Joe’나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 애니메이션 ‘보스 베이비’의 인트로에 사용된 프레드 아스테어의 고전 ‘Cheek To Cheek’, ‘슈퍼배드 3’를 수놓는 마이클 잭슨의 ‘Bad’와 아하의 ‘Take On Me’, 그리고 독특한 스릴러 ‘겟 아웃’의 차일디시 감비노와 우리 영화 ‘옥자’의 존 덴버 등,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 당장 떠오르는 장면과 음악만 해도 여럿이다. 제대로 된 영상과 소리의 조화는 단순한 시각과 청각의 자극을 넘어 기대 이상의 시너지가 된다.
영화에 흐르는 음악의 매혹
내가 영화를 보며 음악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첫 영화는 초등학교 때 봤던 ‘슈퍼맨’이었다. 존 윌리엄스라는 이름을 알게 된 이후 그의 교향악은 ‘영화음악’의 상징과도 같이 내 가슴속에 자리했다. 그리고 스코어가 아닌 기존의 노래가 영상과 얼마나 잘 어울리며 감정을 움켜쥘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융단처럼 펼쳐지며 소리 없이 화면을 메우는 네이팜탄의 불길, 습도 가득한 무더위, 천장의 선풍기, 그리고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에 오버랩 되며 취한 듯 나른하게 몽롱한 숨결로 귓전을 가득 채우는 꿈결같은 짐 모리슨의 목소리. 이 영화의 오프닝은 도어스의 환각적인 곡 ‘The End’와 함께 시작된다. 보는 이의 시각과 청각은 물론 의식까지 모두 빨아들일 듯한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이 기막힌 곡이 아니었으면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약 두 시간 반 동안 관객은 윌라드 대위와 함께 커츠 대령의 의식의 흐름으로 상징되는 강을 따라 유쾌하지 않은, 하지만 헤어나올 수 없는 여행에 동참한다.
▶ 영화 <지옥의 묵시록> ⓒ네이버 영화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온갖 소리를 활용하여 극과 영상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 담긴 소리는 대사(dialogue)와 음향 효과(sound effects), 그리고 영화음악[soundtrack; 노래(song)와 오리지널 연주 음악(film score)]등으로 구분이 된다. 대체로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메시지, 작가의 의도는 화면과 대사만으로 충분히 알 수가 있지만 우리가 그저 줄거리를 파악하기 위해 숨죽이고 스크린에 빠져드는 건 아니다. 우리는 현실처럼 느껴지는 판타지와 그에 따르는 강렬하거나 야릇한 쾌감과 페이소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위해 극장을 찾고 영화를 즐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가상의 현실과 갖가지 소리의 절묘한 결합은 관객의 의식 속에 또 다른 거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작가는 이야기와 영상을 통해 이미 관객의 감정을 동일한 상태로 만들어놓는다. 예를 들어 이티(E.T.)를 태운 엘리엇의 자전거가 추격대를 따돌리고 하늘로 날아오를 때 극장 안을 가득 메우는 탄성과 박수 소리는, 그들의 감정이 급박한 상황하의 긴장 상태에서 막 풀렸으며 동시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감정 상태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서서히 내려오고, 더불어 관객은 다음에 전개될 상황을 기대하게 된다. 이때 관객의 입장에서 개인의 음악적 취향이란 것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교향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존 윌리엄스의 멋진 교향곡에 그는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인디아나 존스의 흥미진진한 모험과 함께하는, 자연스레 즐거운 흥분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신나는 테마 음악은 또 어떤가. 연출자의 음악적 감각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카메라에 담아낸 영상에 어떤 음악을 곁들이냐에 따라 그가 의도한 바대로 관객의 감정을 몰고 갈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많은 연출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작곡을 해 줄 음악가를 찾거나 기존의 음악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시각과 청각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한다. 그렇게 영상과 음악의 절묘한 배치에 성공한 작품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다. 1초에 24개의 사진이 연속적으로 투사됨으로써 우리 눈으로 하여금 그림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는 기술적인 측면은 둘째로 하더라도, 일단 카메라에 담긴 모든 피사체와 상황들은 ‘편집’이라는 왜곡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순의 극복을 위해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 운동과 같은 진지한 성찰의 과정 또한 있어왔지만, 일반적인 영화의 개념인 극영화는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더구나 자본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산업으로서의 대중예술이라는 특수성을 등에 안고 있는 영화는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전해줘야 하는 의무를 떠안고 있다. 현실과 유사한 듯 일정한 거리를 두는 판타지의 공간과 제한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통해 관객은 어떤 의미로서든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음악, 동전의 앞뒷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둘의 관계가 또 어떤 식의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진 |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