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자는 마구 넘겨버리지만, 현명한 자는 열심히 읽는다. 인생은 단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은 말했다. 누구나 인생을 읽지만, ‘어떻게’ 읽을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휙휙 넘길 수도, 한 장 한 장 공들여 읽을 수도 있다. 소리를 내어 글자 하나하나를 되새기는 낭독은 후자다. <낭독 독서법>을 쓴 진가록 작가는 그냥 읽는 묵독과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은 질이 다르다고 말한다. 낭독은 하나의 선포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인생에 가로놓인 벽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낭독을 하면 묵독을 할 때보다 책 속의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 더 쉽다. 진가록 작가의 말대로 ‘글자로 된 책을 조용히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내 목소리를 통해 감정 전달이 더 잘 되는 것’이다. 목소리로 표현된 감정은 다시 귀로 들어온다. KBS에서 방영된 교양프로그램 ‘낭독의 발견’은 이 낭독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자 했다. 낭독은 신체감각이니, 묵독이 주가 되는 디지털 시대에 소리 내어 읽는 ‘몸의 행위’로 감각을 깨우고자 하는 게 제작 의도였다. 방송은 2003년 처음 전파를 탄 뒤 2012년 종영했지만, 책 속에서 글이라는 실이 텍스트라는 옷감이 되는 걸 보는 장면은 잔잔하고 황홀했다. 낭독은 이처럼 묻혀 있는 글자를 소리로 일으켜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게 하는 작업이다.
▶ 1~3 낭독뮤지컬 ‘파리넬리’ ⓒH J 컬처
노래 속에 감춰진 마음 읽어주는 낭독뮤지컬
“사랑하는 내 동생 카를로에게. 정말 오랜만이야. 우리가 헤어진 지도 벌써 2년이 흘렀어. 스페인에서의 삶은 어떠니…?”
“형.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형의 편지를 받고도 한동안 열어보지 못했어.”
신이 내린 목소리를 지닌 동생 파리넬리(루이스 초이)와 불멸의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형 리카르도(이준혁)의 이야기를 담은 낭독뮤지컬 ‘파리넬리’의 한 장면이다.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진행되는 이 공연의 무대에는 오직 동그란 단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18세기 최고의 카스트라토(변성기가 시작되기 전 거세해 소년 시절에 지니는 고음역대를 유지하는 가수)였던 파리넬리의 이야기를 담았으나 낭독뮤지컬은 그의 내면에 더욱 집중한다. 카스트라토가 된 후에 겪었던 악몽과 상실감, 음악이 주는 환희와 고통을 편지에 담는다. 처음에 파리넬리의 노래에 집중하던 관객은 점차 그가 가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파리넬리’는 뮤지컬 제작사 HJ컬처가 기획한 ‘낭독뮤지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작품은 ‘마리아 마리아’였다. 이 작품 역시 예수와 마리아, 앙상블 배우 두 명만이 무대에 섰다. 의자와 탁자뿐인 무대에서 앙상블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책을 읽어주며 극을 진행했다. ‘파리넬리’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배우 두 명이 노래를 하고 편지를 읽으며 극을 이끈다. ‘파리넬리’의 프로듀서인 사노 아유미는 “브로스키 형제가 편지로 서로 속마음을 전하는데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진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스마트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펜을 들고 편지지를 보며 오랜 시간 고민한 마음을 글로 옮기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이다. 실제로 이들의 편지에는 만나지 못한 오랜 세월과 그리움, 깊은 상처가 담겨 있다. 형제가 다시 아름다운 음악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내 삶에 남아 있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노 아유미 프로듀서의 말처럼, 일본에서는 누군가가 마음을 담은 진심을 읽어주는 ‘낭독극’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올해 10주년을 맞이한 일본의 낭독극 ‘내 머릿속의 지우개’다. 두 사람은 ‘일기’라는 소재로 만남부터 알츠하이머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과 그때 느낀 감정을 들려준다. 또 다른 작품 ‘냉장고 위의 인생’은 냉장고에 붙여진 쪽지를 이용해 엄마와 딸의 마음을 낭독으로 알려준다. 이야기꾼도 다양하다. 연극에서 활약하는 배우들 중심에서 작품에 따라 성우, 뮤지컬 배우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성우의 경우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작품을 낭독극으로 다시 만들면 애니메이션에서 역할을 담당했던 성우들이 그대로 대사를 낭독해 무대에 올린다.
7월 28일 ‘마리아 마리아’, 8월 11일 ‘파리넬리’를 무대에 올린 HJ컬처는 8월 23일 ‘살리에르’와 9월 8일 ‘어린왕자’의 낭독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한승원 대표는 낭독공연의 장점으로 “제작비가 줄면 흥행 부담 역시 줄고, 관객들도 온전히 노래와 이야기의 매력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극과 문학 사이, 낭독극
뮤지컬뿐 아니라 소극장에서도 낭독극이 펼쳐진다. 연극계에서 낭독극은 개막 전에 작품을 미리 공개하는 리딩 공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연극을 제작하기 전 투자자를 찾기 위한 쇼케이스나 홍보용이었다. 이제는 어엿한 작품의 한 장르가 됐다. 무대 위에 올라간 낭독극은 시각보다 청각에 의존한다. 때문에 배우들은 의상과 분장보다 목소리에 더욱 집중한다. 무대장치나 조명도 최소화한다. 그야말로 순수한 ‘낭송’에 의존하는 연극이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 오프브로드웨이나 대학가에서는 이런 류의 연극을 ‘스테이지 리딩(Stage Reading)’이라고 부른다. 연극과 문학 사이의 ‘낭독극’이다.
▶ 단편소설 낭독극, ‘1인용 식탁’ 낭독입체극, ‘라스낭독극장’ HJ컬처의 낭독뮤지컬 시리즈
한국에서도 연극과 문학 사이의 공연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8월 21일부터 22일까지 성수아트홀 2층 카페에서는 소설가 윤고은의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이 낭독극으로 공연된다. ‘1인용 식탁’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2018 신진연출가전’ 자유참가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여기에 프로젝트 그룹 ‘키르코스’ 배우들이 참여해 낭독극으로 만들었다.
유시민 작가가 1988년 등단 작품으로 발표한 중편소설 <달>도 무대에 올랐다. 지난 7월 7일부터 9일까지 대학로 후암스테이지 1관에서는 입체낭독극 ‘달’이 공연됐다. 군대의 고문관이라 불리는 주인공 김영민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사와 군대에서의 경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등을 입체낭독극으로 표현했다. 공연기획사 후플러스가 진행한 ‘2018 상생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 5 ‘라스낭독극장’ ⓒLAS
비단 한국 소설만이 아니다. 일본 소설이나 한국 영화도 낭독극으로 무대에 올랐다. 지난 6월 창작집단 라스는 ‘라스낭독극장’을 만들어 이만희 감독의 영화 ‘만추’와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 테이블’을 낭독극으로 올렸다. 2013년부터 작품 발굴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기상프로젝트’의 일부다. 당시 서울 마포구의 소극장 산울림에서는 3주 동안 다양한 장르의 낭독극을 만날 수 있었다. 오카다 도시키의 단편집 <비교적 낙관적인 케이스>에 수록된 ‘쇼핑몰에서 보내지 못한 휴일’과 ‘여배우의 혼’,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 시바 유키오의 1인극 ‘아침이 온다’ 등도 관객에게 선보였다. 낭독극의 경우 배우의 규모나 무대 장치가 축소되기 때문에 제작비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이는 티켓 값에도 영향을 미친다. 관객들에게 낭독극이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는 이유다.
당신의 시집을 펼치면
낭독의 장르에는 제한이 없다. 배우 박정자는 8월 11일 강릉 문화축제 프로그램 ‘시마크 페스티벌 2018’에서 낭독연극 ‘여름 예찬’을 선보였다. 그는 9월 20일에도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 낭독음악회에서 이육사, 도종환, 박용재, 이원 시인의 작품을 낭독할 예정이다. ‘책 읽어주는 클래식’ 음악축제인 이 자리에는 박정자뿐 아니라 배우 손숙, 윤석화 등도 참여한다.
젊은 시인들의 낭독회도 조용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신촌, 합정, 연희동에 자리 잡은 독립서점과 카페를 중심으로 시인의 낭독회가 왕왕 펼쳐진다. 이 낭독회는 보통 소규모로 진행된다. 시인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시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SNS로 신청하면, 선착순으로 마감된다.
▶ 배우 박정자의 낭독극, ‘여름 예찬’ 밥 딜런 낭독회 낭독뮤지컬, ‘파리넬리’
대중가요의 가사를 낭독하는 낭독음악회도 열렸다. 지난 7월 홍대 빨간책방 카페에서는 ‘밥 딜런 낭독회-샷 오브 러브’가 진행됐다. 1부와 2부로 나뉜 낭독음악회는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와 서대경, 황유원 시인 그리고 뮤지션 맥거핀이 함께했다. 서대경, 황유원 시인은 밥 딜런 시선집의 역자이기도 한데, 이들은 시를 낭독하며 이 시를 고른 이유와 밥 딜런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함께 읽었다. 노래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를 노래하는 시간이었던 2부에서는 맥거핀의 보컬 변하금이 밥 딜런의 명곡을 들려주기도 했다.
낭독페스티벌을 연출한 정진세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연극화하더라도 문장에서 나타내려고 한 세심한 표현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낭독극이 그 아쉬움을 채워주었다고. 낭독극은 행위를 최소화한 만큼 온전한 문장의 맛과 행간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무대에 선 이의 몸짓보다 이들의 숨결에 더 집중하게 된다. 눈은 감고 귀를 열게 되는 감각의 시간, ‘낭독의 발견’이다.
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낭독 팟캐스트
1. 예스책방 책읽아웃
매주 목, 금요일 방송된다. 최근 시즌 2에는 오은 시인이 진행을 맡고 있다. 신간을 낸 저자들이 자신의 책을 낭독하고, 책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2. 알라딘의 서재
일주일에 1500권에 달하는 신간 중 추천하는 책 4권을 낭독해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동안 그날의 신간을 만날 수 있다.
3. 낭만서점
2014년 2월 방송 이후 4년 동안 누적 청취자가 400만 명을 넘었다. 화요일 한 편의 소설을 선정해 들려준다. ‘세계문학 읽기’ 코너에서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와 배우 김성현이 매월 두 편의 세계문학 고전을 선정해 낭독해준다.
유슬기│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