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으면 뮤지컬에 관심이 없을까? 장애인도 뮤지컬을 보고 싶다. 현장의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비장애인이 짜놓은 관람 문화에 장애인은 설 곳이 없었다. 장애인과 뮤지컬 사이의 장벽을 없애보자. 장애인의 관람 경계를 허무는 배리어프리 공연을 ‘로뎀스’가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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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공연 연습이 한창인 곳. 막이 오르고 배우가 등장하자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이 눈을 감는다.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옆에 앉은 관객은 계속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대체 공연을 볼 마음이 있는 건지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각·청각장애인이 뮤지컬을 관람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공연 연습만큼 이 과정은 수없이 반복된다.
장애인도 공연을 즐기고 싶다. 대중 공연 관람 시 장애인은 20~50%가량 할인을 받는다. 하지만 관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공연은 비장애인만을 관객으로 상정한 듯 진행된다. 휠체어를 위한 좌석도 찾아보기 어렵다. 시각·청각장애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관람이 허락된 무대는 반쪽짜리에 불과해 보인다. 공연을 절반밖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로뎀스가 장애인을 위해 공연의 막을 활짝 걷어 올렸다. 이른바 ‘배리어프리 공연’이다. ‘배리어(barrier)’는 장애를 포함한 모든 장벽을 뜻하며, 공연 관람의 어려움을 없앤 것이 배리어프리 공연이다. 로뎀스의 배리어프리는 비단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언어 장벽에 가로막힌 외국인도 배려해 영어 자막을 제공한다.
장애인 공연 관람 7.1%에 불과해
이쯤 되면 로뎀스의 정체가 궁금하다. 로뎀스(ROTHEMS, Run On THE Musical Stage)는 연세대 뮤지컬 동아리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들이 모여 공연을 준비한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 발단은 한 청각장애인의 후기였다. “친구들과 로뎀스의 뮤지컬을 두 번 본 적이 있는데 공연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로 뮤지컬을 보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으로 누구나 뮤지컬을 즐기게 하자’가 로뎀스의 모토인데, ‘누구나’에 장애인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연장에서 장애인 관객을 본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장애인은 문화생활을 즐기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4년 실시한 장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문화 및 여가 활동은 TV 시청이 96%를 차지하고 감상·관람은 7.1%에 불과했다. 더구나 뮤지컬은 더욱 접근하기 어렵다. 공연장까지 오는 길은 차치하고라도 연기, 음악, 안무가 어우러진 뮤지컬은 장애인이 관람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이 제공하는 틀 안에서 관람하니 장애인이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를 풀기 위해 로뎀스 팀원들은 머리를 맞댔다. 수화 통역, 스크린 자막 제공, 좌석 모니터 설치 등 고민과 준비를 거듭해 지난 3월 첫 배리어프리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장애인을 위한 좌석을 별도로 마련하고 모니터를 설치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대 장면을 내레이션으로 이어폰에 전달하고, 청각장애인을 위해 소리를 모니터에 문자로 표시했다. 못 보고 못 듣는 장벽을 걷어내자 장애인 관객이 저마다의 상상력을 더해 공연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객석 맨 뒷줄의 의자를 없애고 휠체어 관람객을 위한 공간도 마련했다.
▶ 1 로뎀스 뮤지컬 공연 모습 2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보는 장애인 관람객 ⓒ로뎀스
▶ 3, 4 청각장애인을 위해 실시간 지원되는 휴대전화·모니터 자막 서비스 ⓒ로뎀스
550명의 일반 관객과 시각장애인 20명, 청각장애인 20명, 지체장애인 10명이 관람 후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공연에 대한 감상보다 배리어프리 시도에 대한 고마움이 압도적이었다. 장애인 관객은 그동안의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했다. 몰랐던 공연의 맛을 봤다. 다른 팀의 같은 공연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이런 내용인 줄 몰랐다면서 공연을 즐기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로뎀스 공연의 총기획을 맡고 있는 왕경업(23·산업공학과 3학년) 씨는 “다음 공연도 기대한다는 장애인들의 후기에 손을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로뎀스는 오는 9월에 있을 두 번째 배리어프리 공연 준비에 한창이다. 2011년 서울시에서 제작한 창작 뮤지컬 ‘피맛골 연가’를 다시 무대에 올린다. ‘피맛골 연가’는 조선시대 종로의 뒷골목을 일컫던 피맛골을 배경으로 서출 김생(박창민·이건오 더블 캐스팅)과 사대부가 여인 홍랑(고예빈·한소연 더블 캐스팅)의 사랑이야기를 다뤘다. 극중 서정적인 음악은 관객의 가슴을 울리고 경쾌한 안무는 관객을 들썩이게 한다. 물론 장애인도 이 감정을 공감할 수 있다.
두 번째 배리어프리 공연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될 예정이다. 기존 좌석에 설치한 모니터는 휴대전화로 변환된다. 저마다 소지한 스마트폰을 좌석에 꽂고 무선 앱을 설치하면 자막이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마치 외화에 깔리는 자막처럼 공연과 자막을 불편하지 않게 볼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내레이션도 휴대전화를 통해 제공된다. 일반 관객을 방해하지 않도록 휴대전화에는 화면의 빛이 새어나오지 않게 하는 편광필름을 부착할 계획이다. 장애인의 공연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배석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꽤 큰 의미를 지닌다. 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분 없이 공연을 보고 장내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간단하다. 그런데도 왜 지금껏 시행되지 않았을까? 수지타산부터 했기 때문이다. 장애인 문화 시장이 작으니 투자에 인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장애인이 문화를 향유할 권리는 조용히 무시당했다. 이 권리를 수면 위로 꺼낸 것은 로뎀스 단원들의 문제의식과 실험정신이었다.
오는 9월, 로뎀스가 정성 가득 준비한 무대의 막이 오른다. 왕경업 씨는 “더 많은 장애인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피맛골 연가’의 연출을 맡은 심자연(21·문화인류학과 3학년) 씨는 “배리어프리 공연을 통해 문화생활과 장애인의 간극을 최대한 줄이고 싶고, 장애인이 최대한 공감하고 무대를 멀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피맛골 연가’ 배리어프리 관람 안내
●일시 : 9월 4일(월)∼7일(목) 오후 7시
●장소 :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
●가격 : 인터넷 7000원,
현장 구매 학생 8000원, 일반 10000원
●예매 주소 : goo.gl/AJrgvu
●문의 : 010-8957-0356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