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임숙 행복한 포도향기 대표가 포도농장에서 성장이 늦은 포도알을 솎아내고 있다.│ 김임숙
“주변에 막상 은퇴하면 할 일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집은 포도 과수원집 아들인 남편 덕분에 인생 2막을 좀 쉽고 일찍 준비할 수 있었죠.”
경북 경주시 행복한 포도향기 김임숙(47) 대표는 농장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김 대표는 경주에 땅 3967㎡(약 1200평)를 구입해 2645㎡(약 8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 포도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포항에 사는 김 대표가 경주에 과수원을 만든 이유는 경주 농지 가격이 포항 인근보다 저렴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남편과 상의 끝에 포도 과수원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포항은 땅값이 비싸 저렴한 땅을 찾다, 도로가 뚫리면서 집에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경주에 땅을 사 포도 과수원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장대비가 쏟아진 7월 22일 한적한 경주 외곽 농촌 길을 달려 강동면 호명리에 있는 김 대표의 농장을 찾았다. 그는 남편과 힘을 합쳐 비닐하우스에서 포도를 키웠다. 김 대표는 “나는 농장 관리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비롯해 마케팅과 영업을 담당하고, 힘든 일은 주로 남편이 한다고 했지만 나름 첨단 시설을 갖춰 그렇게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당도 높은 포도를 얻기위해 과수원에 설치된 원격제어 냉각 팬│김임숙
아이 키우던 전업주부서 전문 농업인으로
김 대표가 만든 포도 과수원은 그동안 봤던 노지나 비가림막 과수원과 사뭇 달랐다. 비닐하우스였다. 땅값을 제외하고도 800평 농장을 비닐하우스로 만드는 데 1억 5000만 원이 들었다. 노지나 비가림막 포도농장보다 몇 배나 많은 금액이다. 다른 농부들과 달리 굳이 많은 돈을 들여 비닐하우스에서 포도를 키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품종이 다른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매단 포도나무들이 가지런히 줄을 지어 자라고 있었다. 품종이 무려 23개에 이른다고 했다. 김 대표는 “지구온난화가 심해져 경주에서 잘 자라는 포도 품종을 찾기 위해 다양한 품종을 심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지금은 자타가 인정하는 포도농사 전문가지만 5년 전 농장을 시작하기 전에는 남자아이 셋을 키우느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는 전업주부였다. 포도 과수원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사실 농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정년이 보장되는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어 생활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포도 과수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남편 때문이다. 그의 남편은 포도 과수원집에서 자란 탓에 포도농장을 운영하고 싶어 했다.
김 대표는 “아무리 편해졌다고 해도 농사일을 좋아하는 여자가 얼마나 있겠어요. 남편이 결혼한 지 3~4년 지났을 때부터 아이들이 좀 자라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 포도농사를 짓자고 꼬드겼는데 세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시부모는 경북 영천에서 포도 과수원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런데 영천이 아닌 경주에 과수원을 마련한 이유도 궁금했다. 그는 “경주 농지가 우리가 사는 포항보다 싼 것도 있지만 정보기술(IT) 기기를 접목한 최첨단 스마트 기술로 포도를 키워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포도농사를 지은 시부모님 과수원 근처에서 농사를 짓다 보면 그분들의 경험과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기 쉽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행복한 포도향기는 경주의 토질과 기온 속에서 잘 자라는 품종을 찾기 위해 접순 방식으로 품종을 교체한다.│김임숙
비닐하우스 포도농장에 다양한 첨단 장치 설치
실제 김 대표의 비닐하우스 포도농장에는 다양한 첨단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김 대표가 과수원 관리를 좀 더 편리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면 회사에서 설비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남편이 자신의 경험을 추가해 설비를 구체화했다.
포도나무가 냉해를 입지 않도록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그 안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햇볕이 필요할 때를 위해 버튼 하나로 비닐하우스 지붕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열매가 클 때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점에 착안해 땅에는 관수시설을 묻었다. 일교차가 크면 포도의 당도가 높아진다는 시부모의 조언을 받아들여 밤에는 기온을 떨어뜨릴 수 있도록 하우스에 냉각 팬도 설치했다. 또 기상 상황에 따라 하우스 옆면을 원격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동 온도조절 장치도 달았다.
이들 장치는 휴대전화로 원격 조종할 수 있어 굳이 농장에 나오지 않아도 될 만큼 편리하다. 김 대표는 품종 갱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주 지역에 적합한 포도 품종을 키우기 위해 농사를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네 번이나 품종을 바꿨다. 포도나무는 뿌리와 이어지는 대목에 원하는 품종의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방식으로 수종을 갱신하기 때문에 그의 과수원은 한눈에 봐도 구분이 될 정도로 접붙이기가 여러 차례 이뤄졌다.
김 대표는 “경주에 잘 어울리는 품종을 고른 뒤 IT 기기를 이용해 포도를 생산하기 때문에 과거 포도 과수원을 가꿀 때처럼 많이 일하지 않아도 우수한 품질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행복한 포도향기에서 생산하는 포도의 당도는 최대 23브릭스로 경주 지역에서 나오는 포도들 중 상위 10%쯤 된다.
김 대표는 “한국을 대표하는 포도 산지가 되려면 우리 과수원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과수원들도 우수한 품질의 포도를 대량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해, 실험을 통해 배운 포도 과수원 운영·관리 노하우를 희망하는 지역 농부들에게 전수하고 있다”며 “우리 과수원도 앞으로 4~5년 안에 땅을 살 때 들인 돈을 제외한 비용을 모두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과수원에서 수확한 포도를 경주 로컬푸드 매장에서 팔아 매출을 올리는데, 앞으로 농장을 아이들 체험학습장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환_ <조선비즈> 농업 전문기자.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전자신문> 등에서 기자로 산업 분야를 담당했다. 최근 농업이 유전공학, 정보통신, 기계공학, 환경공학 등의 기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농업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