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기 아띠 대표가 자신의 농장에서 키우는 감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지환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논밭의 상태만 보면 대강 농부의 성실한 정도를 알 수 있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밭은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고 수확 철이면 풍성한 결과물을 안겨주지만, 게으른 농부의 논밭은 늘 잡초가 무성하고 수확물도 볼 것 없다.
9월 17일 전북 삼례에서 감귤농장을 운영하는 김운기(51) 아띠 대표는 스스로가 ‘게으른 농부’라고 했다. 보기에도 그동안 취재를 하며 만난 부지런한 농부들과 달랐다. 비닐하우스에 심어진 감귤나무의 열매들이 익는 시절이라 할 일이 많겠구나 싶었지만 그는 여유로웠다. 말투는 느렸고, 행동도 느긋했다. 복장도 깔끔했다. 마치 남이 운영하는 체험농장에 놀러 온 사람 같았다.
그는 ‘별로 바빠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에 “요즘은 자동화 설비와 스마트기기의 도움으로 아버지 세대 농부들처럼 바쁘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약 3000평(1만㎡)의 비닐하우스에서 감귤을 키우는데 1년에 길어야 두세 달만 일하고 그중에서도 힘이 드는 기간은 채 한 달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감귤농장을 운영하기 전에는 장례식장에서 쓰이는 국화를 키웠다. 주로 일본에 수출했다.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연간 2억 원쯤의 매출을 올렸다. 인건비와 난방비 등 이것저것 비용을 빼도 1억 원 이상 순이익으로 남았다. 농부치고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어느 순간 비닐하우스에서 국화를 모두 뽑아내고 감귤나무를 심었다.
▶3000평 규모의 온실에서 자라는 감귤나무 모습│박지환
주 재배작물 국화 버리고 감귤나무로 승부
농부가 주로 키우던 작물을 바꾸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김 대표처럼 꽃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던 사람이 과일로 변경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농작물을 키우려면 거름 주는 일부터 수확, 보관까지 모두 새로 배워야 한다. 작물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공들여 잘 키워도 수확한 농작물의 판로를 개척하는 일은 별개 문제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 농부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새로 배우고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주 재배작물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는 국화가 돈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경 쓸 것도 많고 스트레스도 심했다고 말했다. 인건비와 난방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사람이 직접 국화 순을 하나씩 잘라서 심어야 하고, 큰 꽃송이를 얻기 위해 중간중간 곁순도 쳐야 했다. 그 인건비가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인건비도 인건비지만 사람을 구하는 일 자체도 어려워 스트레스가 컸다”고 말했다. 비닐하우스라고는 하지만 온도가 적정 수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꽃의 상품성이 떨어져 모두 버려야 해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도 그를 지치게 했다.
김 대표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 농사를 짓고 싶었다고 했다. 지구온난화로 한반도 기온이 상승하면서 제주도에서나 가능했던 감귤나무를 전남과 경남 등 남해안에서도 키우는 점에 착안해 감귤농사로 변경하는 것을 고민했다. 결심에 앞서 먼저 농촌진흥청에서 내놓은 다양한 감귤농사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했다. 그 결과 국화꽃 재배에 쓰던 비닐하우스를 이용하면 자신이 사는 전북 삼례에서도 감귤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2010년 감귤나무를 먼저 심어놓고, 그 뒤로 감귤농사를 짓는 제주도 농부들에게 직접 농사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 나는 대로 제주도를 찾았다. 하지만 초기에는 헛걸음의 연속이었다. 제주도 농부들은 그를 경계했다. 감귤산업을 도 차원에서 보호·육성하는 제주도의 특성 때문에 제주도 농부들이 잠재적인 경쟁자인 그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면 20차례 이상 제주도를 방문했다. 감귤농사 기술을 배우지 못하고 제주도 경치만 구경하다 온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농촌진흥청에서 운영하는 제주도 감귤연구소를 알게 됐고, 그곳을 통해 감귤 재배와 관련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연구소 직원에게서 소개받은 현지 농부들을 통해 실제 감귤농사를 짓는 기술도 조금씩 익혔다. 지금도 시간이 날 때면 제주도를 찾아 감귤연구소 연구원들과 농부들을 만나 기술을 배우고 실제 농사 지을 때 필요한 조언을 듣는다.
그렇게 쌓은 기술로 2015년부터 소량이지만 감귤을 수확할 수 있었다. 감귤나무를 심은 지 5년이 흐른 뒤였다. 제주도 현지 농부들이 감귤나무를 심은 지 빠르면 3년 뒤부터 감귤을 수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셈이다.
▶아띠 농장은 스마트 기술을 이용해 농장에 자동으로 온도조절, 물 공급을 하고 있다(왼쪽). 아띠 농장의 익기 시작한 감귤│박지환
효율성 위해 스마트기기 비닐하우스에 설치
김 대표는 농사의 효율성을 위해 국화를 키울 때 경험한 각종 농업 관련 스마트기기를 자신의 감귤 비닐하우스에 설치했다. 국화를 키우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이 컸다. 그의 감귤농장은 스마트기기에 온도와 습도만 설정해 놓으면 기계가 자동으로 환기하고, 팬을 돌려 온도를 떨어뜨린다. 스프링클러를 이용해 수분이 부족하면 물을 공급하기도 하고, 병해충이 발생할 때는 약제도 뿌린다. 양액기를 이용하면 거름을 줄 일도 없다. 자동화 설비 덕분에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인부를 쓸 때는 꽃이 필 때 솎아주기를 하거나 수확할 때뿐이다. 그가 직접 하는 일도 많지 않다.
김 대표는 “판매에 대한 부담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농장이 전주와 가깝다는 점을 이용해 아이들 체험학습장으로 개방했다. 어린이 한 명당 1만 원을 내면 마음껏 감귤을 먹을 수 있고, 1kg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더니 방문객이 연간 4000명쯤 된다고 했다. 남는 과일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직접 수확해 학교 급식용으로 납품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순이익은 꽃을 재배할 때와 비슷한 연간 1억 원쯤 된다고 했다.
그는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소득이 줄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 구하는 일을 비롯해 조금만 방심해도 농사를 모두 버리는 등의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며 “굳이 감귤농사가 아니더라도 농부들도 이제 그동안 해온 작물만 고집할 게 아니라 시대 흐름에 적응하고 공부해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환_ <조선비즈> 농업 전문기자.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전자신문> 등에서 기자로 산업 분야를 담당했다. 최근 농업이 유전공학, 정보통신, 기계공학, 환경공학 등의 기술과 밀접하다는 점을 깨닫고 농업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