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조 19년 기우제를 지내는 일을 계획하며 영조가 지은 글과 시를 새긴 현판│국립고궁박물관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청와대가 전면 개방됐다. 74년 만이다. 청와대를 둘러본 시민들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실시간 올라와서 ‘방구석 시청’도 가능하다. 의전 행사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사용된 한옥인 상춘재부터 대통령과 가족이 거처했던 가장 사적인 공간인 관저까지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구중궁궐의 담장 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복궁에도 건물 기능에 맞춰 근정전, 강녕전, 사정전, 교태전 같은 글씨가 현판에 새겨져 있듯이 청와대도 주요 시설에는 현판이 있다. 대통령 관저 입구 현판은 인수문(仁壽門)이다. 이 문을 드나들면서 어질고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상춘재(常春齋)는 봄이 항상 머무는 공간이란 뜻이다.
왕의 지침이나 뛰어난 글귀 등 담겨
현판은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나무판을 일컫는다. 보통 누각이나 절, 정자, 사당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처마 아래)에 걸려 있다. 지금은 현판에 주로 단체나 건물명이 각인되지만 옛 건물 현판은 국가의 통치철학, 또는 왕의 지침이나 뛰어난 글귀 등도 담겨 있다. 사람이 이름으로 불릴 때 존재하듯이 건물 역시 요즘 말로 하면 간판을 달 때 생명력을 얻는다.
현판은 조선시대 궁중 건축의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조선왕조 궁중 현판’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으로 등재됐다. 등재 대상은 16~20세기 초에 걸쳐 제작돼 조선 궁궐에 걸려 있던 현판들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770점이다.
5대 궁궐인 경복궁·경희궁·덕수궁·창덕궁·창경궁뿐만 아니라 종묘 등 사묘(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까지 조선 왕실 관련 건물의 현판들이 모두 포함된다.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됐으나 보편화한 시기는 조선시대다. 조선왕조 궁중 현판은 기본적으로 해당 건물의 성격을 알려주는 데다가 문학과 서예, 건축 등의 형태에 왕실이 추구한 정신세계인 유교 사회와 예술적 가치를 온전히 녹여 냈다는 점에서 유네스코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조선 건국 뒤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새로 지으면서 궁중 현판도 같이 제작됐다.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아 왕이 덕을 베푸니 후왕이 ‘크나큰 복’(경복·景福)을 받을 것이라며 경복궁이라고 새 궁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울러 궐 안의 주요 전각과 문 이름도 만들었다.
왕의 침전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하라는 뜻에서 강녕전(康寧殿)으로, 주요 행사를 치르던 정전은 정치를 부지런히 하라는 뜻에서 근정전(勤政殿)으로, 왕과 신하가 평소 정사를 펼치던 편전은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뜻에서 사정전(思政殿)으로 했다.
조각이나 무늬 장식도 절제미 중시
조선왕조 궁중 현판은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건물의 성격을 드러낸 현판, 국가 운영 지침이나 도덕 규범 같은 시대적 가치를 되새길 수 있게 한 현판, 관리 명단이나 국가 행사 등의 정보를 담아 관청 운영에 도움을 주는 현판, 중국의 옛 시구나 왕의 감회를 담아 왕실의 생각을 세상과 공유하는 현판 등이다.
현판의 외관은 대체로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백성이 공경해 떠받들 수 있도록 위엄을 갖추면서도 사치스럽지는 않게 장식했다. 그래서 조각이나 무늬 장식도 절제미를 중요하게 여겼다.
때마침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5월 19일부터 8월 15일까지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특별전을 열어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 궁중 현판을 처음으로 전시한다. 가장 큰 현판은 덕수궁(옛 경운궁) 정문에 걸려 있던 ‘크게 편안한 문’이란 뜻의 대안문(大安門)이다. 이 현판은 가로 길이만 3.74m에 이른다. 1904년 경운궁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훼손돼 대안문을 수리했으며 당시 ‘큰 하늘’이란 의미의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 현판을 달았다.
가장 오래된 현판은 1582년 제작된 의열사기(義烈祠記)다. 각각 백제 의자왕과 고려 공민왕 때 충신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조선 중기 명필인 석봉 한호가 썼다.
주말 나들이로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아 성군·백성·신하·효 등 조선왕조의 정치 이념이 오롯이 새겨진 현판을 고즈넉하게 둘러보길 추천한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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