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0년 만에 청와대 앞길이 모든 시민에게 활짝 열렸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의 검문에 느껴야 했던 긴장감은 더 이상 없다. 지하철 경복궁역을 나와 청량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여유로움 섞인 콧노래마저 부르게 된다. 다채로운 음악의 향연은 덤이다.
▶ 11월 18일까지 매주 토요일 청와대 사랑채 앞마당에는 장르를 불문한 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C영상미디어
지난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청와대 앞길에 우리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통 성악 중 하나인 정가(正歌)를 바탕으로 남자 가객과 여자 가객, 해금과 피아노로 구성된 ‘연노리’ 팀이 들려주는 퓨전 국악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노랫소리에 우리나라 전통악기를 입힌 구수한 가락에 어깨가 절로 움직인다.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는 지난 9월 30일부터 11월 18일까지 매주 토요일 청와대 사랑채 앞마당에서 공연 프로그램 ‘예술로, 산책로’를 선보인다. 청년 예술가와 생활문화동호인들이 펼치는 국악, 클래식, 뮤지컬, 마임 등 장르를 불문한 예술 공연이다. 청와대 사랑채 일대를 한국 관광문화예술의 체험 공간과 국민 친화적 공간으로 재조명하는 한편, 청년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이 무대 공간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제공하겠다는 게 프로그램 운영 목표다.
협회 관계자는 “인큐베이팅된 젊은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더 많은 관객을 만나 자생력을 도모할 수 있도록 이번 야외공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다”며 개최 의의를 밝혔다.
청와대 사랑채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발자취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종합관광 홍보관이다. 여타 전시관 구조와 다를 바 없지만 한껏 흥에 젖어 들썩거리는 통에 앞마당을 지나던 시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30여 개 남짓한 간이용 의자 위를 빼곡 채운 관람객의 모습도 진풍경이다. 손을 마주 잡은 채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녀, 노래하는 여성을 하얀 도화지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학생, 아빠 품에 안겨 귀를 쫑긋 세운 아이 등 공연을 즐기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 우쿨렐레 동호회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이어진 공연은 서울시 구로구 청년으로 구성된 우쿨렐레 동호회 ‘울레길’ 회원들의 연주였다. 귀에 익은 노래 몇 곡을 우쿨렐레만의 특유한 소리로 표현하며 눈길을 끌었다. 25세부터 40세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인 울레길은 ‘끈끈한 사람들의 모임과 나눔’을 콘셉트로 지역 기반 연주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때문에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뽐낼 수는 없지만 보다 친근한 분위기로 관람객에게 다가설 수 있는 게 매력이다.
▶ 전통 가곡을 노래하는 청년 예술가 ⓒC영상미디어
마지막으로는 건반, 바이올린, 아쟁, 성악이 한데 모여 클래식을 재편곡한 곡과 순수 창작곡을 연주하는 ‘타래’ 팀의 앙상블이 펼쳐졌다. 끝을 모르는 고음에 곳곳에서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주 중간에 악보가 바람에 흩날리는 당황스러운 상황도 있었으나 관객과 긴밀하게 호흡할 수 있는 버스킹만의 묘미다.
이들 공연이 만족시키는 것은 관람객만이 아니다. 늘 자신의 역량을 뽐낼 수 있는 장이 부족했던 공연자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더욱이 수십 년 만에 개방된 공간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더했다.
연노리 팀은 “청년 예술가에게 무대는 굉장히 소중한 곳”이라며 “청와대 앞에서 공연하면서 남다른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좁은 거리 덕에 관객과 보다 가까이 소통할 수 있는 점을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과거 선비들이 풍류방에 갇혀 시를 쓰고 읊어주며 발전한 전통 가곡을 부르다 보니 가까이 앉은 관람객에게 전달력이 한층 높아졌다.
▶ 제각각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C영상미디어
공연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기회 생겨
울레길 팀도 공연 공간의 가치에 주목했다. 이 팀은 “음향이나 환경적인 측면에서 좋은 편이라 할 수는 없다”면서도 “청와대 인근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타래 팀은 “유명하지 않은 청년 예술가들은 공연 환경이 상당히 적다”며 “이 기회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우리 음악을 알릴 수 있고 우리에겐 부족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지켜보는 얽매인 형태의 공연이 아닌, 오고 가며 또는 잠시 머물 수도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홍대 ‘걷고 싶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버스킹 공연을 떠올려도 좋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소 쌀쌀해지는 바람을 견뎌낼 수 있도록 외투를 챙길 것을 권한다. 인근에서 한복을 빌리거나 직접 챙겨 입고 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외국인 관람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청와대 사랑채를 찾은 외국인들은 주변 곳곳을 돌아보며 사진촬영을 하거나 공연을 즐긴다. 외국인의 방문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모습은 아니다. 청와대에 따르면 앞서 9월 30일부터 10월 9일까지 사랑채 방문객 중 약 8.2%를 외국인이 차지했다.
사랑채 앞마당에서 공연만 보고 돌아가기 아쉽다면 사랑채 기획전시실을 들르는 것도 팁이다. 이곳에서는 일정 주기마다 다양한 전시를 만날 수 있는데, 현재 ‘김치랑 밥 한술 하실래요?’라는 주제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한국의 김치’, ‘세계 속의 김치’, ‘김치 캐릭터 3D 컬러링 게임 체험’, ‘김치 모형 전시’ 등 세세한 섹션이 마련돼 관람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근하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