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암살자(Silent Assassin).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를 질주하고 있는 박인비(25)의 별명이다. 미국 언론이 ‘포커페이스’ 박인비의 경기 모습을 보고 붙여준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은 마치 그림자 같다.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는 지난해 상금왕과 베어트로피(최저타수상)를 거머쥔 박인비의 폭풍 샷으로 더욱 뜨겁다.
지난 4월 30일까지 LPGA 투어는 8개 대회를 치렀다. 박인비는 이 가운데 7개 대회에 출전해 3승을 거뒀다. 2월 혼다 LPGA 타일랜드와 4월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그리고 노스텍사스 LPGA 슛아웃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우승 확률은 42.8퍼센트다. 파죽지세다. 세계랭킹은 물론이고 시즌 상금 순위와 올해의 선수상 등에서 모두 1위를 질주하고 있다.
세계랭킹은 올 시즌 첫 메이저대회였던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위에 처음 등극한 뒤로 3주째 1위다. 순위 포인트 10.12점을 획득해 2위 스테이시 루이스(미국·9.13점)와 격차를 1점 가까이 벌렸다. 4월 29일 노스텍사스 LPGA 슛아웃에서 마지막 날 역전 우승을 차지하며 점수를 더욱 끌어올렸다. 시즌 상금 누계는 84만1,068달러(약 9억4,000만원)이고 올해의 선수상 포인트는 127점이다.
정말 무섭다. 특히 그의 퍼팅은 치명적이다.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강력한 무기다. 노스텍사스 LPGA 슛아웃의 마지막 날 경기를 봐도 그렇다. 박인비는 11언더파 단독 선두로 출발한 카를로타 시간다(23·스페인)에 2타 뒤져 있었다. 13번 홀까지 시간다는 2타를 더 줄여 14언더파였고 박인비도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12언더파로 따라붙었다. 어쩌면 우승이 없는 시간다에게 2타 차는 공포였을 것이다.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는 타수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시간다는 결국 박인비에게 저격됐다. 박인비의 끈질긴 추격에 스스로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박인비는 열 살 때인 1998년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았다.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던 해다. 박세리가 LPGA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운 박인비는 중학교 1학년 때인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2002년 US여자주니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낸 그는 2006년 프로로 전향해 퓨처스투어 상금 순위 3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풀시드 출전권을 확보한 지 2년 만인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최나연·신지애와 동년배인 ‘세리 키즈’
메이저 대회에서 첫 승을 거두며 깜짝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박인비는 이후 알 수 없는 슬럼프에 시달렸다. 우승은커녕 2009년에는 컷 통과에 실패한 대회가 더 많았을 정도다. 신지애와 최나연 등 동년배 한국 선수들이 승승장구하던 때여서 상처는 더 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10년부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를 병행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린 박인비는 2012년 7월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개인 통산 두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2012년 상금왕에 오르며 화려한 2013년을 예고한 그는 올 4월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두번째 메이저 트로피를 차지하며 마침내 세계랭킹 1위 자리에 올랐다. 한국 선수로는 신지애에 이어 두번째다.
전문가들은 박인비의 강력한 무기로 침착함을 꼽는다. 그의 골프는 오랜 금언 중 하나인 ‘골프는 두번째 샷부터다’라는 얘기에 더 가깝다. 아이언 샷과 퍼팅이 좋다. 아이언 샷의 그린 적중률은 73.8퍼센트로 10위 수준이지만 평균 퍼트 수는 28.57개로 6위다. 그중에서도 그린에 공을 올려놓았을 때의 홀당 퍼트 수가 1.707로 1위다. 버디를 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뜻이다. 노스텍사스 LPGA 슛아웃 최종 라운드에서도 보기 없이 버디만 4개를 낚는 무결점 플레이 덕분에 역전 우승을 일궜다.
올해 박인비는 28라운드 동안 120개(5위)의 버디를 낚았다.
라운드당 평균 4.29개의 버디를 잡는 셈이다. 이처럼 ‘버디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보기가 없는 플레이가 많기 때문이다. 버디를 많이 해도 다른 홀에서 타수를 잃게 되면 큰 의미가 없다. 미국의 스테이시 루이스(28)가 올해 들어 박인비보다 무려 30개나 더 많은 150개의 버디(부문 1위)를 하고도 1승에 그치고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실수가 많다는 의미다.
무결점 플레이로 상대방 의지 꺾어
반면 박인비는 라운드당 언더파를 기록할 확률이 82.1퍼센트로 1위고, 60타대 스코어로 경기를 끝마칠 확률에서도 53.6퍼센트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정말 ‘조용한 암살자’라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지는 골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 선수들이 박인비를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버디 기회의 완벽한 포착’이다. 즉, 마지막 날 우승을 다투는 상대 선수 입장에서 볼 때 거의 비슷한 퍼팅 라인에서 박인비는 넣고 자신의 퍼트는 빠지면 큰 갈등이 생긴다. 골프는 멘탈 게임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과 요소가 반복되면 시쳇말로 ‘멘붕(멘탈붕괴)’에 빠진다.
109주 동안 세계랭킹 1위를 지켰던 청야니(24·대만)는 “(박)인비에게는 4미터 이내에서는 무조건 오케이를 줘도 될 정도로 퍼트가 좋다”고 했다. 박인비는 “미야자토 아이(일본)보다 퍼트를 더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LPGA 투어 선수 중에 미야자토가 나보다 한수 위다”라고 겸손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잡생각 있으면 퍼트가 잘 될 수가 없다. 코스에서 딱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머리를 비우고 경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퍼팅 능력의 8할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글·최창호(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