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두산 베어스의 오재일
두산 베테랑 투수 배영수(38)는 키움 마지막 타자 제리 샌즈를 투수 땅볼로 처리하고 우승을 확정 지은 뒤 아홉 살이나 어린 포수 박세혁(29)한테 어린아이처럼 안겼다. 이어 두산의 모든 선수들이 마운드로 달려와 서로 얼싸안았다.
두산 선수들이 준비한 우승 세리머니는 한국시리즈 내내 화제를 모은 ‘셀카(셀피) 세리머니’였다. ‘이 순간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인증샷을 찍는 듯한 포즈다. 주장 오재원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뒤 모든 선수를 모아놓고 진짜 스마트폰을 높이 들어 올렸다. 선수들은 스마트폰 앞에 모여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며 즐거워했다.
▶두산 선수단이 10월 26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한국시리즈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201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예상 밖으로 싱겁게 끝났다. 정규리그 성적은 두산이 1위(88승 55패 1무), 키움이 3위(86승 57패 1무)였지만 승차가 2경기에 불과한 데다 맞대결에선 되레 키움이 9승 7패로 앞섰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선 두산이 4전 4승으로 키움을 압도했다. 키움은 1점 차로 두 번, 2점 차로 한 번 졌다. 1, 2차전은 9회말 끝내기 안타를 맞았고, 4차전에선 8-3 넉넉한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무릎을 꿇었다.
언뜻 한 뼘 차밖에 나지 않아 보이지만 우승과 준우승의 간격은 넓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두산 선수들은 큰 경기에 강했다. 숱한 위기에서도 장타력을 갖춘 키움 타선을 차분하게 막아냈다. 반면 창단 11년 만의 첫 우승에 대한 간절함이 지나친 탓이었을까. 키움의 응집력은 고비 때마다 흐트러졌다.
▶두산 선수들이 시상식이 끝난 뒤 춤을 추고 있다.│한국야구위원회
4차전 9회말 명암 가른 분수령
사실 올해 프로야구 타격 타이틀은 키움 타자들 잔치였다. 박병호가 홈런왕(33개)을, 샌즈가 타점왕(113개)을, 김하성이 득점왕(112개)을 차지했다. 이정후는 200안타에 불과 7개 모자란 193안타로 이 부문 2위에 올랐다. 그러나 키움의 폭발력은 두산 앞에서 ‘가을 잠’을 잤다. 반면 두산 타선은 필요할 때마다 터졌고, 키움 타선은 결집하지 못한 채 숱한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키움은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5-2로 앞서던 8회와 5-3으로 쫓기던 9회 연속 병살타로 달아나지 못했다. 8회말에는 2루수 김혜성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1점을 내주더니, 9회말엔 마무리 오주원 등 불펜이 힘없이 무너졌다.
4차전에서도 마찬가지. 막강 불펜을 자랑하던 키움은 8-3으로 넉넉히 앞서다가 믿었던 불펜이 힘없이 무너지며 8-9로 역전을 허용했다. 키움은 9회말 거짓말 같은 끝내기 기회를 잡았다. 1사 1루에서 등장한 대타 김웅빈이 두산 1루수 오재일의 옆을 꿰뚫는 안타로 1, 3루를 만들었고, 대타 박동원이 볼넷을 골라 1사 만루의 천금 같은 기회를 잡았다. 흐름도 키움 쪽이었다.
▶두산 배영수(왼쪽)와 오재일이 우승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이 장면, 즉 4차전 9회말은 이번 한국시리즈의 명암을 가른 분수령이었다. 키움은 김규민이 투수 앞 땅볼에 그치며 홈으로 뛰어들던 3루 주자가 아웃됐다. 이어진 2사 만루에서 서건창이 3루 앞 강습 타구(두산 3루수 허경민의 실책으로 기록)로 9-9 동점을 만들었지만 한국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김하성은 좌익수 뜬공으로 힘없이 물러났다. 키움의 기세는 딱 거기까지였다.
약점을 보이면 잡히는 게 승부의 세계다. 힘을 모으지 못한 ‘영웅들’(히어로즈)을 끈질긴 ‘곰들’(베어스)이 가만둘 리 없었다. 두산은 곧바로 연장 10회초 키움 에이스 제이크 브리검을 상대로 정규리그 타율 0.164에 불과했던 주장 오재원과 이 경기 직후 결국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한 오재일의 연속 2루타로 결승점을 뽑았다. 연이어 터진 김재환의 적시타는 보험용 쐐기타였다.
두산 타선은 한국시리즈에서 3할에 가까운 팀 타율(0.295)을 기록하며 0.243에 그친 키움의 방망이를 압도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지배했던 키움의 막강 불펜은 두산의 끈질긴 방망이 앞에서 4경기 중 3경기(1, 2, 4차전)나 좌절했다.
두산은 지난 2년간 아픔이 컸다. 2017년에는 KIA 타이거즈와 막판까지 정규리그 우승을 다투다 불과 2경기 차이로 정규시즌 1위 자리를 내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KIA에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이어 2018년에는 정규리그 2위 SK에 무려 14.5경기나 앞서며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SK한테 역시 쓰디쓴 패배를 맛봐야 했다.
▶두산 선수들이 관중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역대 최다 경기 차 뒤집기로 1위
그러나 올해는 정반대였다. 정규리그 내내 1위를 달리던 SK에 한때 9경기 차까지 뒤졌지만 프로야구 역대 최다 경기 차 뒤집기를 연출하며 극적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는 SK를 물리치고 올라온 키움에 내리 4승을 따내며 손쉽게 정상에 올랐다.
두산 야구를 흔히 ‘화수분’에 비유한다. 주전이 빠져도 백업이 올라와 공백을 훌륭히 메우곤 한다. 올해도 마찬가지. 두산은 당대 최고의 포수 양의지(32)가 NC로 이적했지만 양의지의 백업으로 뛰던 박세혁이 ‘우승 포수’로 성장했다. 박세혁은 정규리그뿐 아니라 한국시리즈에서도 투타에서 맹활약했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투수들을 잘 리드하며 키움 타선을 무득점으로 막았고, 타석에서 2타수 2안타 2타점을 올리며 데일리 MVP에 뽑혔다.
▶김태형 두산감독과 장정석 키움 히어로즈 감독이 경기가 끝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
한때 두산 타선을 이끌던 양의지와 ‘타격 기계’ 김현수(31·LG 트윈스)와 공수를 겸비한 민병헌(32·롯데 자이언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팀을 떠났지만 2~3년 후배들이 부럽지 않은 활약으로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90년대생 4인방은 그 중심에 있었다. 박건우(29)는 2차전에서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치고 MVP에 올랐다. 정수빈(29)은 1차전 6-6 동점 상황, 9회말 무사 1루에서 1루수 앞 기습 번트로 출루하며 결승점의 밑돌을 놨다. 허경민(29)은 1차전에서 3안타를 치는 등 차분하게 경기를 치렀다. 여기에 포수 박세혁까지 큰 힘을 보탰다. 2019년 두산의 가을 DNA는 정말 달랐다.
김동훈_ <한겨레>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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