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문 대통령은 당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할 것을 카자흐스탄에 요청했다.│청와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추진 상황
독립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일제 탄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가 전승 100주년을 맞았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당시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가 협조를 약속해 양쪽이 실무 협의를 해왔다. 정부는 1962년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바 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유해 봉환은 지체되고 있지만,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3월 1일 3·1절을 맞아 청산리전투와 함께 항일 무장 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전승으로 꼽히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홍 장군을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과 함께 3·1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면서 “오늘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정부의 숙원
문 대통령은 “2019년 계봉우·황운정 지사 내외분의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며 “협조해준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질오르다주 정부 관계자들, 장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고 묘역을 보살펴온 고려인 동포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선열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이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갈 힘을 키우는 일”이라며 “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봉오동전투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정부의 숙원이었다. 2019년 4월 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 당시 독립유공자인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봉환하면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도 추진했다. 하지만 홍 장군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다. 분단의 현실과 장군의 묘역이 여전히 동포 사회의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정부는 당시 “홍 장군의 유해도 봉환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2년 우리나라가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부터 추진됐다. 김영삼정부는 1995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지만,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라는 점을 들어 연고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카자흐스탄 정부나 동포 사회는 남북 사이에서 장군 유해 봉환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에 장군의 묘역을 조성하고 장군을 민족지도자로 기린다. 카자흐스탄 정부 역시 1994년 ‘홍범도 장군 거리’를 선포할 정도로 장군을 존경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해 봉환에 가장 동의가 필요한 장군 후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점도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최초의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를 올린 전투로 꼽히는 봉오동전투 승리 100주년 기념우표│연합
홍 장군 공격에 일제 속절없이 무너져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다.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 매복해 있던 홍 장군과 독립군의 일제 사격에, 일본 정예부대 월강추격대대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일본군 사망 157명에 부상 300여 명이었다. 우리 독립군 피해는 전사 4명에 그쳤다.
하지만 코로나19 등의 어려움으로 봉환이 잠정 연기돼 정확한 날짜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정부는 다시 한번 의지를 밝혔다. 대한민국 독립군의 역사적 첫 승리인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지 100년째 되는 6월 7일, 문 대통령은 장군의 유해를 반드시 조국으로 모셔오겠다며 송환 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100년 전 오늘,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우리 독립군이 중국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정규군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바로 봉오동전투”라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이자 후손에게 미래를 열어갈 힘을 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감을 얻고, 고통받던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희망을 갖게 됐다”며 “의병뿐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 등 평범한 백성으로 구성된 독립군의 승리였기에 겨레의 사기는 더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너도나도 가난한 살림에 의연금을 보태 독립군의 무기 구입을 도왔고, 식량과 의복을 비롯한 보급품 마련에 나섰다”며 “승리와 희망의 역사를 만든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가슴에 새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100년이 지난 오늘 코로나19 국난 극복의 원동력도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라며 “국민은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지켰고 연대와 협력으로 코로나19 극복의 모범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승리와 희망의 역사를 만든 평범한 국민의 위대한 힘을 가슴에 새긴다”며 글을 맺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모습│연합
‘독립군 기지’로 봉오동 주목해야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조직을 재정비한 계기도 됐지만, 이면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요소도 몇 가지 있다.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2019년 계간지 <역사비평> 5월호에 기고한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다시 보기’에서 “봉오동전투에 참가한 양측 인원과 사상자 수조차 누구도 이렇다 할 연구를 제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봉오동전투 현장’이라며 게재된 지린성의 봉오저수지가 실제 전투 현장인 ‘상촌 인근’에서 8~10㎞ 떨어진 하촌에 있다며 “우리는 그동안 전투 현장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을 기억했다”고도 지적했다. 아울러 “우리는 봉오동에서 전투를 당연시하거나 사실의 하나로 간주했을 뿐, 왜 그곳이었는지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며 봉오동을 단순히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곳이 아닌 ‘독립군 기지’로 이해하고 접근하자고 제안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중대와 소대의 편제를 갖추고 상촌의 연병장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 준비된 독립군이었으므로 ‘독립군 기지’로 봉오동을 주목하자는 거다. 그러면서 최진동을 포함해 봉오동에 거주하던 최명록 삼형제의 물적 기반 등에 힘입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최적이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일본군을 상대로 사상자 450여 명을 내고, 독립군의 의지를 한껏 드높인 봉오동전투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은 단연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등에 따르면, 1868년 8월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다. 친일로 특권을 누리던 이들이 거침없이 조국을 배신할 때, 홍 장군은 누구의 지시나 부름도 없이 스스로 의병이 됐다. 언뜻 공개된 사진을 보면 단신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홍 장군은 키가 190㎝에 이르러 ‘구척장신의 장군’이라 불렸다. 날카로운 눈빛에 딱 벌어진 어깨, 특히 뛰어난 총 솜씨를 자랑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에 의병투쟁을 결심한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모두 앞세워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외로운 영웅이기도 했다.
하지만 홍 장군의 말년은 비참했다. 잇따른 홍 장군의 승전보에 일본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연해주로 본거지를 옮겼다가 다시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옮긴 홍 장군은 1943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박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