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 ‘옮겨진 산수유람도’, 디지털 프린트, 84×67cm, 2006
사전 예약을 하고 방문한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입구에서 한 사람씩 체온을 재고 QR코드를 찍은 후 입장했다. 관람하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아슬아슬한 일상 속에서 다행히(?) <새 보물 납시었네>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전시 제목이 상큼하다. “새 보물 납시었네!” 어렵거나 근엄하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가볍거나 경박하지도 않다. 부제도 간단명료하다. ‘신국보보물전 2017~2019’. 2017년부터 2019년 사이 새로 지정된 국보와 보물 83건, 총 196점이 공개되는 전시다.
진열장 속 유물은 단순히 문화재라는 의미를 넘어 예술품으로 손색없었다. 말 그대로 하나같이 ‘보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보물은 모두 국가 소유가 아니다. 사립 박물관, 사찰, 개인 소장가 등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것도 많다. 그래서 이렇게 한자리 모아놓고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이번 전시를 위해 보물을 빌려온 기관은 34곳, 이 가운데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22점이나 된다.
‘마상청앵도’ 패러디한 ‘옮겨진 산수유람도’
그런데 전시품 중 일부는 9월 27일까지 열리는 전시 기간 내내 볼 수 없다. 몇몇 유물은 3주 동안만 전시되고 다른 것으로 바뀌어 걸린다. 주로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나 글씨가 그렇다. 밝은 조명 아래 오래 두면 상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가 그런 예다. 보물 제1970호로 지정된 이 그림은 8월 11일까지만 전시됐다. 서둘러 전시를 보러 간 이유도 사실 이 때문. 몇 년 전 간송미술관에서 본 ‘마상청앵도’를 다시 한번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옛 그림 중에서도 ‘마상청앵도’를 각별히 좋아한다. 제목 그대로 말(馬)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청각적 자극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조선의 풍속과 시적인 정취까지 성공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고 평했다. 100% 공감한다. 실제로 그림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꾀꼬리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림 속 인물은 김홍도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그림 솜씨 하나로 연풍현감 벼슬까지 오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산 단원이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린 나이는 50대 중반, 원숙함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전성기 때다. 그래서일까. 꾀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과 표정이 왠지 쓸쓸하고 회한에 젖어 보인다.
조선시대 그림은 대부분 그림만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글과 글씨, 즉 ‘시서화(詩書畵)’가 어울려야 제대로 된 그림 대접을 받았다. ‘마상청앵도’도 마찬가지다. 화면 왼쪽 위, 세로로 쓰인 한시가 역시 길쭉한 화면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시는 김홍도와 동갑내기 동료 화원화가 이인문(1745~1824?)이 지었다. “佳人花底簧千舌(가인화저황천설·고운 여인 꽃 아래서 천 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 꾀꼬리의 생태를 아름답게 은유적으로 읊은 내용이다. 글씨는 김홍도가 직접 썼다.
▶김홍도,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종이에 수묵담채, 117×52.2cm, 18세기 말~19세기 초, 간송미술관 소장
지필묵 대신 컴퓨터로 이미지 조합·출력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훨씬 흥미로운 현대미술 작품이 있다. 덕성여대 동양화과 임택 교수의 ‘옮겨진 산수유람도’ 시리즈다. 동양화에서 출발한 임택은 전통을 계승하는 차원을 넘어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된 전통을 보여준다. 옛 그림이나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을 일부러 흉내 내거나 차용하는 표현 기법을 ‘패러디(parody)’라고 하는데, 미술뿐 아니라 음악·영화·문학 등 현대예술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패러디는 교묘한 표절이나 비도덕적인 모방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풍자, 과장, 익살, 명작에 대한 존경 등 창작자의 명확한 의도를 솔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를 패러디한 임택 작가의 이 작품이 아주 좋은 예다. 하인을 거느리고 나귀 등에 올라앉은 나그네는 노란색 ‘뉴비틀’을 탄 자가운전자로 바뀌었고, 버드나무와 꾀꼬리는 입체적으로 표현됐다.
주인공과 배경이 과거에서 현재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마상청앵도’와 똑같다. 원작의 여백은 뭉게구름 피어난 파란 하늘로 대체됐다. 그래서 한결 밝고 상쾌하다. 퀴퀴한 세월의 때를 씻어내고 재기발랄한 현대의 옷을 입힌 형국이다. 패러디를 통해 형식은 달라졌지만 원작이 지닌 애잔한 풍취는 변함없다.
시대가 변하면 화가의 표현 방식도 따라서 변하는 법. 임택은 전통 동양화가를 고수해온 지필묵 대신 디지털카메라와 포토샵 프로그램을 활용한다. 입체로 만든 이미지를 촬영하고 조합해 디지털 프린터로 출력한다. 21세기, 동시대 동양화는 이런 모습이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