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종이에 채색, 43×36cm(55.5×47.5cm 액자 크기), 1977
화가 천경자 이야기에 앞서 미술관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은? 이 질문에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이라고 답한다면 누구라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두 미술관은 자타 공히 한국 최고 미술관임이 틀림없다. 굳이 1, 2위를 따지기는 좀 곤란하다. 각각 국립과 사립 미술관으로서 설립 배경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넘버3’ 미술관은 어디일까? 여기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서울시립미술관을 대한민국 넘버3 미술관으로 손꼽겠다.
미술관은 단순히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갤러리와는 성격이 다르다. 상업성이 배제된 공공기관으로서 사회적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미술관 위상은 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수와 수준에 좌우된다. 미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전문성과 차별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집품(소장품)을 연구하고 보존하며 전시를 통해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울시립미술관은 국립도 아니고 사립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있다.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제도가 본격화되면서 전국에는 수많은 도립, 시립, 심지어 구립, 군립 미술관이 경쟁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대부분 지자체 미술관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건립됐다. 몸체만 겨우 갖추었을 뿐 수준 높은 소장품이나 제대로 된 콘텐츠를 지니지 못한 게 현실이다.
▶천경자, ‘여인의 시Ⅱ’, 종이에 채색, 60×44.5cm, 1985
열정적 인생만큼 화려한 채색화
따지고 보면 서울시립미술관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개관한 해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옛 경희궁 자리에 있던 서울고등학교 건물을 미술관으로 처음 사용했다. 당시에는 관장도 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이었다. 1999년이 되어서야 초대 관장이 공식 부임했고, 일제강점기 최고재판소 건물이었던 것을 개보수해 2002년 재개관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에 앞서 1998년, 고건 서울시장 재직 때 화가 천경자는 자신의 대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1991년 발생한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절필 선언을 하는 등 시련을 겪은 뒤였다.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대규모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천경자는 1998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3층에는 천경자의 상설 전시장이 있다. 천경자가 기증한 그림과 그가 사용하던 화구, 사진 등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여성으로서 한국화 채색화 분야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인생 여정은 작품 못지않게 숱한 일화를 남겼다. 2015년 8월 6일, 먼 타향 땅 미국 맨해튼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향년 90세.
천경자의 별세 소식은 인생의 유한성과 예술의 무한성을 새삼 실감케 했다. 비록 육신은 사라졌지만, 한 예술가가 남긴 작품의 생명력은 영원할 테니. 생전에 천경자는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법의 잣대로 논란은 일단락 지어진 듯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끝내 이 판결을 수용하지 않았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천경자, ‘인도 바라나시’, 종이에 채색, 27×24cm, 1979
▶천경자, ‘스카프를 쓴 엔자’, 종이에 채색, 27×24cm, 연도 미상│서울시립미술관
삶의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
1982년, 58세 때 천경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 그림은 지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어요. 지난 40년을 돌아보면 5년 혹은 10년마다 그림이 달라졌어요. 열아홉 살 때 선전(鮮展)에 입선했던 ‘조부상(祖父像)’과 ‘노부(老婦)’는 사실적이고 학생다운 작품이었어요. 뱀을 그린 것은 20대 후반 매우 고통스럽던 시절이었는데, 뱀을 그림으로써 나는 어떤 껍질을 깰 수 있었어요. 30대에 서울로 올라온 후 사실적이던 화풍이 환상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지요. 40대 후반의 그림들은 몇 차례 해외 스케치 여행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환상이 좀 더 세계성을 띠었다고 할까요. 앞으로 내놓을 그림은 무언가 이 세상의 그림이 아니고 저승의 그림, 4차원의 세계와 같은 그림이 될 것 같아요. 아마 그 그림들은 무시무시해서 잘 안 팔릴 것 같소, 잉.”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던 천경자.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자 미친 시늉까지 하며 결국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나 화가가 된 여자. 자신의 인생을 예술에 모두 쏟아부었던 천경자. 그녀는 불꽃같은 사랑과 이혼, 홍익대 교수, 월남전 종군화가,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세계 여행 등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인생을 살았다.
서울시립미술관 3층 상설전시실에 걸려 있는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작가가 54세에 22세 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천경자의 트레이드마크인 여인과 꽃과 뱀이 모두 등장한다. 삶의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한 천경자의 이 그림은 서울시립미술관 최고 소장품이다. 언젠가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한다면 이 작품을 꼭 보길 권한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