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란

2020.06.01 최신호 보기



올봄에는 비가 좀 내리는 것 같다. 매년 황사로 공기가 지저분해질 때마다 비가 내려 대기와 도시를 깨끗하게 씻어주기를 바랐는데 몇 년 동안 지구는 메마르고 가물었다. 비가 너무 오지 않는다는 전망과 걱정 속에 비가 내리는 날들이 이어져 다행이다.
비가 내리면 계절과 시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 같다. 대기가 어둑해져 오전과 오후를 인식하기 어렵고 날이 쌀쌀해져 계절과 상관없이 긴팔을 챙기게 된다. 명징한 시간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그 흐릿해짐은 매혹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비가 온다는 걸 확인한 뒤 창밖을 내다보며 아, 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을 좋아한다. 지겨워질 때까지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순간도 특별하다.
대학생 때 나는 비가 내리면 학교에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옷과 신발이 젖을 것 같아 밖에 나가기 싫은 게 아니라 비가 와서 밖이 어둑하고 빗소리와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지면 해야 할 일이나 정해진 일을 향한 마음에 회의가 생겼다. 슬그머니 일상을 밀어내고 싶어졌고 그런 마음의 손을 기꺼이 들어주곤 했다.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필기하는 일이 지긋지긋했다기보다는 그런 일들이 다 시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 한두 번 수업에 빠지게 되었고 1년쯤 지나자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비가 오면 학교에 안 오는 애’가 되어 있었다. 다행인 건 장마 기간이 여름방학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안 간다고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기대앉아 멍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발코니에 앉아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집 근처에 있던 2층 카페에 가서 창가 자리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학교나 회사에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할 시간인데 나는 여기 가만히 멈춰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그럴싸한 기분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계획적으로 하루 땡땡이를 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다시 일상의 일을 해낼 힘이 생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는 몇 년 동안 나는 비가 오면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에서 비가 와도 출근해야 하는 월급쟁이로 지냈다. 스무 살이 넘으면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스스로를 어른이라 여기고 살았으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른의 정의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게 되었다. 어른이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아무렇지 않게, 별일 아닌 것처럼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정의는 반대의 의미도 포함한다. 어른은 좋아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것도 상황에 따라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며 무조건 참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른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힘을 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드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어른의 자세와 태도를 유지하며 사는 게 어렵다.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거나 하고 싶은 것을 고민 없이 다 해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은 쉽다. 그런 사람이 권력을 쥐고 중요한 직책을 맡고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수록 주변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이 곤란해진다. 아이가 아이처럼 행동할 때보다 어른이 아이처럼 굴 때 더 큰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 오는 날 일하러 나갈 때 나는 이따금 기억 속에 있는 철부지를 떠올린다. 그때처럼 정해져 있는 일정을 다 그만두고 잠수를 탄 채 창밖만 내다보고 싶어 하는 아이를 들여다본다. 그 아이가 나를 붙잡아 세우려 할 때, 이렇게 좀 쉬어 가야 다시 일할 힘이 생기지, 라고 따지듯 말할 때 나는 그 투정을 충분히 들어준 뒤 가만히 타이른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대신 비 오는 창밖을 멍하게 내다보는 시간을 꼭 가지자고. 그게 더 의미 있을 거라고.

 서유미_ 소설가.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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