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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이 되면서 흰머리가 급격하게 늘었다. 부모님 모두 이른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되셨고 엄마는 50대에 염색을 시작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흰머리가 늘어나는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고 미약한 마음의 준비를 저만치 앞서갔다.
다행히 머리숱이 많은 편이고 서리가 내린 것처럼 표면에 흰머리가 생긴 것이 아니라 머리를 들추거나 옆으로 넘길 때 눈에 보이는 정도였다. 한마디로 가만히 있으면 티가 잘 나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서 머리가 날리거나 머리를 만질 때면 어어, 거기 흰머리 많이 보이는데, 하는 반응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소설 수업을 하러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 거울에 비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흰머리나 가르마나 정수리 쪽에 튀어나온 흰머리를 족집게로 뽑았다. 처음에는 서너 개 뽑던 것이 어느 날은 열 개를 넘기도 하고 흰머리를 뽑다가 수업 시간에 늦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염색을 해야 하나, 한다면 언제쯤?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기분 전환이나 멋을 위해 염색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생소한 고민이기도 했다.
아마 아이가 없었거나 아이가 중학생쯤 되었다면 나는 흰머리가 많아지는 것에 대해 좀 더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른다. 아직 노화나 흰머리에 대한 개념과 감각이 없는 아이는 엄마가 친구들 엄마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것을 대장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다. 눈가의 주름이나 흰머리를 발견할 때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다가도 엄마는 나이가 많으니까 일찍 죽는 거냐고 물으며 울상이 되기도 한다.
50대에 염색을 시작한 엄마는 60대 중반까지 염색을 하다가 칠순이 가까워지면서 그만두셨다. 10년 정도 염색을 하다 보니 머릿결과 두피가 많이 상하고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귀찮다고 했다. 엄마가 염색을 그만두었을 때, 뿌리부터 자라기 시작하는 흰머리가 머리 전체를 천천히 감싸서 염색을 안 한 진짜 엄마의 머리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그 더디고 낯설고 어색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중간에 다시 염색을 하는 게 어떠냐고 권하기도 하고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니 늙어 보여서 속상하다는 말도 했다.
완전한 ‘그레이 헤어’를 마주한 뒤에도 한동안은 눈에 익지 않아 엄마를 볼 때마다 울적해졌다. 엄마는 천천히 늙어 저런 모습이 된 것인데 그동안 염색으로 인해 인지하지 못하다 염색을 중단하니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았다. 엄마의 친구분들도 염색을 끊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말이 많았다고 한다.
엄마가 자연스러운 그레이 헤어로 지낸 지 10년 정도 되었다. 이제는 염색했던 시절의 엄마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더 어색할 정도로 흰머리를 휘날리며 사는 엄마가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나이 든 분들의 머리 모양에 관심이 없었는데 몇 년 전부터 거리에서 멋진 그레이 헤어를 한 분들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멋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염색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아이를 보면서 초등학생 때까지는 염색을 해서라도 젊음의 유지가 아니라 늙음을 들키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동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자연스럽게 늙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아직은 가방 안에 족집게를 넣어둔 채로 삐져나오는 것만 한두 개 뽑고 있지만, 흰머리가 뽑을 수 없을 만큼 많아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고민을 엄마에게 털어놓으니 아직 덜 늙어서 그런 거라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해라, 억지 부리지 말고 상황에 맞게. 염색을 안 하겠다고 버틸 필요도 없고, 염색을 해가며 억지로 젊음을 유지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마음속에 그레이 헤어를 품은 채로 살기로 했다.
서유미_ 소설가.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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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