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인사를 주고받는다. 대부분 인사는 지금의 안녕에 대해 묻지만 이 시기의 인사는 앞으로 안녕을 기원한다.
새로운 해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마음으로 물들어 있나. 새해 인사를 주고받을 때마다 지나가는 해와 그 한 해의 여러 날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얼 하며 지냈고 무엇을 이뤘으며 무엇을 잃었는지 돌아보는 일은 일기를 쓰는 마음과 닮았다.
다이어리에 간단하게 메모를 남기는 날이 더 많지만 여전히 나는 일기를 길게 쓴다. 그날 있었던 일, 만난 사람과 나눈 대화와 감정에 대해 쓰다 보면 나 자신과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는 기분이 든다. 그 대화 속에서 마음이 풀어지기도 하고 호감이 피어오르거나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30대까지 일기는 그렇게 속에 있는 걸 쏟아내며 하루를 정리하는 마무리 역할을 했다. 40대가 되면서 일기의 방향은 하루의 마무리에 머물지 않고 다짐으로 나아갔다. 난 괜찮은 인간,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떤 것이든 전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려면 자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결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오늘은 이런 것 때문에 슬펐고 이런 말과 행동에 대해 후회하니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 일기를 쓰면 곧잘 흘러나오던 감상 대신 결심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결심한다는 건 의지를 갖는다는 뜻이라 그런 변화가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1년쯤 그런 일기를 쓰다 보니 몇 개의 결심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또렷이 드러났다. 비슷한 내용의 문장을 계속 기록하는 일은 예상보다 곤혹스러웠다. 무엇보다 일기를 쓰는 동안 마음이 예전처럼 풀어지거나 편해지지 않았다. 펜을 놓고 자리에 누웠을 때 감은 눈 위로 자책이 떠다녔다.
10대, 20대 때의 일기를 보면 넘치는 감상 때문에 부끄러웠는데 결심으로 점철된 일기를 다시 읽으면 오답 노트를 보는 것처럼 불편했다. 친한 친구에게 어떤 하루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는데 공감과 이해를 받기보다 지적과 충고를 듣는 기분이랄까. 맞는 말을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울적해지는 기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고 한동안 다이어리에 간단한 메모만 남겼다.
40대 초반이 지나면서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와 대화하는 순간의 편안함과 기쁨이 필요했다. 일기를 쓰는 순간만큼은 느끼는 그대로, 자학이나 비판보다 수다 떠는 기분으로 임하자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하루를 기록하는 일기에 기대를 곁들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랬지만 내일은 다를 거야. ‘실수했다, 실수하지 말자’에서 ‘실수했지만 다음에는 괜찮을 거야’로 기록의 마무리를 바꾸었고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에 대해 쓰지만 내일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살아보니 지난 1년도 별다른 게 없었고 어떤 순간에는 더 나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디기 힘들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마음이 아니라 공허한 메아리가 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이를 먹어 삶의 이력은 늘어가는데 왜 인생에 대해 더 모르겠고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뒤만 돌아보는 게 아니라 삶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을 찾아 들여다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살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 살고자 하는 마음, 나아지길 기대하는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나아지리라는 낙관을 품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번져나갔으면 좋겠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고 한 살 더 먹었으니 그냥 산다’가 아니라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느슨하고 막연한 기대가 지금의 나와 우리에게 필요하다.
서유미_ 소설가. 200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두 권의 소설집과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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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